[BOOK 책 속 이 사람] 히틀러의 정부, 거울 혹은 블랙박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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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에바 브라운, 히틀러의 거울
하이케 B. 괴르테마커 지음, 박병화 옮김, 쿠폰북, 1만7000원

“내겐 독일이라는 신붓감이 있어. 난 독일의 운명과 결혼한 거야.” 히틀러의 입버릇이 그랬다. 그런 ‘장엄한 거짓말’이 선전장관 괴벨스를 통해 나치 독일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유포됐음은 물론이다. 독재자에게 21살 연하의 애인 에바 브라운이 있었다는 사실은 패전 이후에야 알려졌다. 사람들 반응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에바는 공식석상에 등장한 적도 없었다. 그들이 숨바꼭질을 즐긴 탓이다. 금발의 에바는 1935년 이후 각종 행사에 나타났으나 총통의 개인 비서 자격으로 수행원 사이에 묻혀있었다.

 이 책은 에바의 생애를 다룬 책이다. 두 사람이 1945년 4월 지하벙커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고, 동반 자살했다는 게 우리 상식이다. 에바는 총통의 희생양에 불과할 텐데 재조명할 가치가 있을까? 혹시 선정적인 책은 아닐까? 전혀 오해다. 이 책은 우리 인식의 허점을 파고든다. 에바는 제3 제국의 보이지 않는 실세이며(144쪽), 제3 제국의 각종 잔악행위에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공범 혹은 종범(從犯)이라는 게 이 책의 입장이다.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 [쿠폰북 제공]

 한미한 집안의 시골 아가씨 에바가 어떻게 히틀러를 만나 숨겨진 정부(情婦)역할을 해냈는가의 디테일을 추적한 이 책의 초점은 다시 히틀러로 모아진다. 결코 주변인물이 아니었던 에바는 악마 아닌 사람 히틀러의 숨겨진 면모를 알려줄 훌륭한 거울 혹은 블랙박스란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히틀러 평전의 최고봉인 『히틀러 1,2』(이언 커쇼)『히틀러 평전 1,2』(요하임 페스트)의 성취에 못지않다. 냉철하고 중립적인 평전의 표준이라고 해도 좋다.

 둘의 첫 만남은 1929년 뮌헨. 그건 다분히 우연이었다. 열일곱 에바는 당시 인기 직종이던 사진 스튜디오의 보조 직원이었는데, 스튜디오 주인장이 히틀러의 전속 사진사였다. 초창기 다소 시큰둥했고 밀고 당기던 둘 사이는 6년 뒤 에바가 권력의 안방마님 자리를 꿰차는 관계로 급진전됐다. 히틀러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했던 그녀가 “오버잘츠베르크의 안방마님”이 됐던 것이다.

 오버잘츠베르크는 알프스 기슭의 요새 겸 저택으로 히틀러 후반기 권력의 핵심이었다. 여기에는 괴벨스 등 추종자와 그들의 부인들로 득시글댔다. “에바는 늦어도 35년 무렵에는 히틀러 측근 중에서도 가장 탄탄한 지위”(349쪽)를 차지했으며, 추종자과 부인들은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심지어 에바가 기르던 강아지에게도 아부했다. 히틀러는 왜 에바를 선택했을까? 의심 많은 그에게 맹목적 충성심을 가진, 평범한 에바는 어쩌면 훌륭한 반려였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순진한 여자 에바’의 이미지를 거의 전면적으로 바꿔놓은 이 책은 요즘 역사학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당시 저질러진 잔혹행위란 몇몇 권력자는 물론 일반인·여성들의 묵인 아래 이뤄졌다는 시각이다. 실은 저자도 독일의 여성이다. 이 책이 곧 영화로 만들어질 모양인데, 반드시 챙겨볼 생각이다.

조우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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