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자객의 비수냐 쇼군 장검이냐…허영호 VS구리 패권다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허영호, 구리(왼쪽부터)

‘중고 신인’ 허영호(22) 7단이 박정환 8단을 2대0으로 꺾고 생애 처음으로 세계무대 결승에 올랐다. 중국의 강자 구리(27) 9단도 이세돌 9단을 격파한 여세를 몰아 한국의 신예 강호 김지석 7단을 2대0으로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1~3일 유성 삼성화재 연수원에서 벌어진 제15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총상금 6억원) 준결승전 3번기. 결과는 모두 2대0이지만 내용은 박빙이었고 수없는 역전과 아슬아슬한 위기로 점철된 명승부였다. 결승전(우승상금 2억원)은 다음 달 7~10일 중국 베이징 한국문화원에서 열린다.

◆허영호 7단 VS 박정환 8단=수읽기가 발군인 17세 박정환은 한국 바둑의 미래를 짊어질 천재 기사로 이미 이창호 9단 등을 꺾으며 타이틀을 수차 거머쥔 바 있다. 세계무대에선 걸맞은 성적을 내지 못해 절치부심해 왔고 이번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여 뼈를 깎는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너무 강한 집념이 패인이었을까. 박정환은 준결승 첫 판(1일)을 지자 밥 먹을 자격도 없다며 저녁을 굶었고 2국 전날 밤엔 새벽 3시까지 기보를 보며 명상에 잠겨 있었다. 1국에서 최후까지 반 집을 이길 수 있는 바둑을 역전당한 것이 가시처럼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던 것. 이런 흐름 속에서 박정환은 2국(3일) 역시 승부처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며 분루를 삼켜야 했다. 수읽기가 발군이라는 박정환이 제한시간 2시간 중 마지막 30분을 모조리 투입하며 둔 수가 그만 패착이 되고 만 것이다.

 전체적으로 허영호 7단의 안정감이 돋보였으며 균형감과 힘이 배어 있는 행마는 한국랭킹 5위까지 치고 올라간 최근의 급격한 상승세가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줬다. 1, 2국 모두 불계승.

 ◆구리 9단 VS 김지석 7단=8강전에서 세계랭킹 1위 쿵제 9단을 꺾은 김지석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예상과 달리 첫 판은 구리 9단의 완승. 두 번째 판도 구리가 초반 접전에서 승리하며 앞서나갔다. 8강전에서 숙적 이세돌 9단을 꺾은 구리의 저력을 새삼 절감해야 했다. 그러나 김지석의 집요한 추격으로 바둑은 곧 형세불명으로 빠져들었고 종반에 접어들 때는 김지석의 승리가 굳어진 듯 보였다. 구리는 특히 끝내기가 가장 큰 약점으로 지목되어 왔기에 김지석과 구리의 승부는 4일의 3국으로 넘어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연속 사고가 발생했고 바둑은 끝내 흑을 쥔 구리의 반집 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복기를 마치고 대국장을 빠져나오며 김지석은 “20번도 넘게 이길 기회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반집을 이겨 있었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허영호 7단 대 구리 9단의 결승전=구리의 바둑엔 대장군의 풍모가 있고 당연히 그의 칼은 장검이다. 그는 큰 칼을 휘두르며 전면전을 즐긴다. 안목도 대국적이다. 허영호는 이미 4년 전 신예대회에서 우승한 중고 신인이지만 새롭게 알을 깨고 나와 공포감을 짙게 풍기는 ‘자객’으로 변신했다. 그의 칼은 단검이지만 구리의 장검 못지않게 치명적이다. 결승전은 장군과 자객의 대결이자 장검과 단검의 대결이 될 것이다. 객관적인 전력은 구리가 앞서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허영호의 잠재력이 한 달 후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른다.

박치문 전문기자

<삼성화재배에서 빛 본 허영호 정석>

허영호 포석, 준결승 2국 승부처(위쪽부터)

삼성화재배 준결승전 제2국

○·박정환 8단 ●·허영호 7단

흑1로 두어 8까지 진행되는 포석은 허영호 7단이 지난해 삼성화재배 32강전 추쥔 8단과의 대결에서 처음 사용했다. 이 판에서 진 허영호 본인은 그 후 이 포석을 멀리했으나 박정환 8단, 박영훈 9단 등이 사용하며 그 우수성이 증명되었다. 본래 흑1은 A에 넘는 수가 보통이었으나 흑1이 우하귀를 크게 지키는 요소라는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지금은 모든 기사들이 두루 사용하는 유행 포석의 하나가 되었다.

<허영호가 본 승부처 해부>

 허영호 7단이 흑1로 막았을 때가 이 판의 최대 고비. ‘수읽기의 귀재’ 박정환 8단이 제한시간 두 시간 중 마지막 30분을 몽땅 털어 넣은 끝에 백2, 4를 결행했는데 이 수가 공교롭게 패착이 되고 말았다.

 백6까지 패가 되어서는 흑 승이 90% 결정됐다. 백2로 A에 두었으면 흑 대마는 살길이 없었고 바둑도 여기서 끝날 뻔했다. 허영호 7단은 “이 장면은 참고도를 100개는 그려야 답이 나온다”며 “오죽하면 박정환 8단이 30분을 장고하고도 패착을 두었겠느냐”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