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호, 구리(왼쪽부터)
‘중고 신인’ 허영호(22) 7단이 박정환 8단을 2대0으로 꺾고 생애 처음으로 세계무대 결승에 올랐다. 중국의 강자 구리(27) 9단도 이세돌 9단을 격파한 여세를 몰아 한국의 신예 강호 김지석 7단을 2대0으로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1~3일 유성 삼성화재 연수원에서 벌어진 제15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총상금 6억원) 준결승전 3번기. 결과는 모두 2대0이지만 내용은 박빙이었고 수없는 역전과 아슬아슬한 위기로 점철된 명승부였다. 결승전(우승상금 2억원)은 다음 달 7~10일 중국 베이징 한국문화원에서 열린다.
◆허영호 7단 VS 박정환 8단=수읽기가 발군인 17세 박정환은 한국 바둑의 미래를 짊어질 천재 기사로 이미 이창호 9단 등을 꺾으며 타이틀을 수차 거머쥔 바 있다. 세계무대에선 걸맞은 성적을 내지 못해 절치부심해 왔고 이번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여 뼈를 깎는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너무 강한 집념이 패인이었을까. 박정환은 준결승 첫 판(1일)을 지자 밥 먹을 자격도 없다며 저녁을 굶었고 2국 전날 밤엔 새벽 3시까지 기보를 보며 명상에 잠겨 있었다. 1국에서 최후까지 반 집을 이길 수 있는 바둑을 역전당한 것이 가시처럼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던 것. 이런 흐름 속에서 박정환은 2국(3일) 역시 승부처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며 분루를 삼켜야 했다. 수읽기가 발군이라는 박정환이 제한시간 2시간 중 마지막 30분을 모조리 투입하며 둔 수가 그만 패착이 되고 만 것이다.
전체적으로 허영호 7단의 안정감이 돋보였으며 균형감과 힘이 배어 있는 행마는 한국랭킹 5위까지 치고 올라간 최근의 급격한 상승세가 결코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줬다. 1, 2국 모두 불계승.
◆구리 9단 VS 김지석 7단=8강전에서 세계랭킹 1위 쿵제 9단을 꺾은 김지석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예상과 달리 첫 판은 구리 9단의 완승. 두 번째 판도 구리가 초반 접전에서 승리하며 앞서나갔다. 8강전에서 숙적 이세돌 9단을 꺾은 구리의 저력을 새삼 절감해야 했다. 그러나 김지석의 집요한 추격으로 바둑은 곧 형세불명으로 빠져들었고 종반에 접어들 때는 김지석의 승리가 굳어진 듯 보였다. 구리는 특히 끝내기가 가장 큰 약점으로 지목되어 왔기에 김지석과 구리의 승부는 4일의 3국으로 넘어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연속 사고가 발생했고 바둑은 끝내 흑을 쥔 구리의 반집 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복기를 마치고 대국장을 빠져나오며 김지석은 “20번도 넘게 이길 기회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반집을 이겨 있었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허영호 7단 대 구리 9단의 결승전=구리의 바둑엔 대장군의 풍모가 있고 당연히 그의 칼은 장검이다. 그는 큰 칼을 휘두르며 전면전을 즐긴다. 안목도 대국적이다. 허영호는 이미 4년 전 신예대회에서 우승한 중고 신인이지만 새롭게 알을 깨고 나와 공포감을 짙게 풍기는 ‘자객’으로 변신했다. 그의 칼은 단검이지만 구리의 장검 못지않게 치명적이다. 결승전은 장군과 자객의 대결이자 장검과 단검의 대결이 될 것이다. 객관적인 전력은 구리가 앞서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허영호의 잠재력이 한 달 후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른다.
박치문 전문기자
<삼성화재배에서 빛 본 허영호 정석>삼성화재배에서>
허영호 포석, 준결승 2국 승부처(위쪽부터)
삼성화재배 준결승전 제2국
○·박정환 8단 ●·허영호 7단
흑1로 두어 8까지 진행되는 포석은 허영호 7단이 지난해 삼성화재배 32강전 추쥔 8단과의 대결에서 처음 사용했다. 이 판에서 진 허영호 본인은 그 후 이 포석을 멀리했으나 박정환 8단, 박영훈 9단 등이 사용하며 그 우수성이 증명되었다. 본래 흑1은 A에 넘는 수가 보통이었으나 흑1이 우하귀를 크게 지키는 요소라는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지금은 모든 기사들이 두루 사용하는 유행 포석의 하나가 되었다.
<허영호가 본 승부처 해부>허영호가>
허영호 7단이 흑1로 막았을 때가 이 판의 최대 고비. ‘수읽기의 귀재’ 박정환 8단이 제한시간 두 시간 중 마지막 30분을 몽땅 털어 넣은 끝에 백2, 4를 결행했는데 이 수가 공교롭게 패착이 되고 말았다.
백6까지 패가 되어서는 흑 승이 90% 결정됐다. 백2로 A에 두었으면 흑 대마는 살길이 없었고 바둑도 여기서 끝날 뻔했다. 허영호 7단은 “이 장면은 참고도를 100개는 그려야 답이 나온다”며 “오죽하면 박정환 8단이 30분을 장고하고도 패착을 두었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