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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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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월간지 '사상계'가 군사정권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해 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몇 해 전부터 청구권 문제에 관한 김종필 중정부장과 오히라 외상의 비밀 메모 내용이 알려지면서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가 학원과 사회 각계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징용 징병은 물론이요 국가 및 개인이 식민지 기간에 입은 피해의 보상이 일괄적으로 일본 측은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막연하게, 한국 측은 유상 보상금이라 해 놓고 필리핀의 절반쯤인 삼억불로 타결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표현은 한일 국교 정상화라고 해 놓았지만 그야말로 동북아에서 냉전의 마지막 고리를 맺어 두려는 미국의 끈질긴 종용과 조정에 의한 것이었다. 타결 이후 즉시 월남 파병이 실시된 것으로 미루어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박정희가 윤보선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미 국무장관 러스크가 방한하여 한일회담을 공개적으로 촉구하기까지 한다. 3월경부터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위'가 결성되어 정치권에서 학원가, 종교계 등 전 사회로 반대 시위가 이어지더니 4주년 기념이 되는 4.19 날을 기점으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래도 지금보다는 대학의 인문적 지성의 역할이 존중되던 순진한 시절이었다. 그중에서도 반공 후진 국가의 대학 치고는 제법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던 서울 문리대에 다니던 상득이, 인상이, 우석이, 국정이 등은 선배 조동일, 김윤수 등이 주동이던 '민족문화운동'을 거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통해서 나중에 김도현이나 김영일(지하)등과도 알게 된다. 당시에 그들의 문화운동은 아직은 시작 단계의 창작극 공연이나 전통문화 공부였다고 기억한다. 김영일도 그때에는 희곡을 썼는데 상득이와 국정이가 연기를 하고 있어서 대본을 보고는 내가 '감상적'이라고 한마디로 물을 먹였던 생각이 난다. 폐병 걸린 문청 비슷한 인물과 가족과의 갈등이 심리극처럼 처리된, 어떻게 보면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비슷하게 보이는 작품이었다.

언젠가 창작극을 공연한 뒤풀이 자리에 우연히 놀러 갔다가 술자리에서 김영일의 외삼촌이며 연출가였던 정일성과 인사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의 솔직하고 담백한 인품을 좋아하는데 나중에 미국에 이민 갔던 그가 인생의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뉴욕에서 윤한봉이의 한국청년연합 안에 문화운동 조직 '비나리' 창립을 하면서 정일성은 장사 일을 전폐하고 날마다 연습장에 와서 도움을 주곤 했다.

1960년대의 초창기 문화운동은 당시 식민지 종주국이던 일본의 영향력이 미국의 안내로 한반도에 다시 들어오고 남한의 주도세력 거의 전부가 친일 분자라는 민족적 위기감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유독 '문화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돌이켜볼 때 사회운동의 여러 길과 실천 중에서 전쟁 이후 '문예'를 방법으로 선택한 최초의 사례였기 때문이다. 문리대의 향토문화 장례식, 또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등은 소박했지만 알 만한 학생들 간에는 널리 화제가 되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들은 5월 말에 단식을 시작했고 그것은 6월에 절정을 이룬 학생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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