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쉽게, 보기 좋게” 국내 첫 영문 의학서 만든 교수님 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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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의과대 본과 시절부터 10여 년 각고의 노력 끝에 국내 첫 영문 의학교과서를 만들어낸 가톨릭의대 세 교수. 왼쪽부터 장정원·주지현·조재형 교수.

1993년 가톨릭대학 의과대 본과에 들어간 세 젊은 의학도는 ‘원서’라 불리는 두툼한 영문 의학 교과서를 받아 들었다. 쓸 만한 우리말 의학 교과서가 거의 전무한 시절이라 대안은 없었다. 우리나라 의대생이라면 숙명처럼 원서를 끼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의학 원서는 독해하기 힘든 데다 이론 위주여서 병원 임상 현장과 동떨어지기 일쑤였다. 간혹 번역본이 있었지만 원서와 대조하며 읽어야 할 정도로 오역이나 졸역이 많았다. 또 국내 저자의 교과서도 몇 권 있었지만 결핵·암·당뇨병 등 특정 주제에 특화된 것이라 일반 교과서로는 부적합했다.

 의대 동기들도 이런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들 세 사람이 달랐던 건 이 문제를 손수 해결해 보겠노라고 나선 것이었다. 본과 4년생이던 96년 조재형·주지현·장정원 세 학생은 삼국지 ‘도원결의(桃園結義)’라도 하듯 비장한 마음으로 서울 남산에 올랐다. ‘미국 하버드대학 의대생들이 우리 책으로 공부하는 날을 위하여’라는 당찬 목표를 세웠다. 쟁쟁한 의대 교수들도 시도하지 않는 일에 풋내기들이 겁 없이 덤벼든다고 주변의 냉소가 쏟아졌다.

‘세 친구’가 만든 영문 의학교과서 표지엔 갓 쓴 나그네가 등장한다. 도표·사진·그림 등 다양한 시각물로 구성돼 배우기 쉽고 의사들이 실제 환자 치료에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다.

산고 내과 교과서를 만들기로 하는 바람에 이들의 전공은 자연스레 내과가 됐다. 조씨와 장씨는 책 내용을 지도처럼 배열하는 도표식 원고를, 주씨는 각종 장기·질병 등의 사진을 맡았다. ‘돈키호테’ 기질이 있던 조씨가 일을 몰아치면 ‘산초’ 별명의 주씨도 맞장구쳤다. 너무 페달을 밟는다 싶으면 신중한 ‘햄릿’ 장씨가 제동을 걸어 속도조절을 했다. 종전의 교과서와 차별화하기 위해 환자의 임상 사진을 모으는 데 주력했다.

 “의사들은 보통 특이한 임상 사례 사진이나 조직 소견에 관심이 많아요. 논문 쓰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흔히 보는 임상 사진이나 방사선 사진이야말로 교과서에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조재형)

 셋 다 영어 실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가급적 글 대신 도표·그림으로 설명하려 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도원결의’ 7년 만인 2003년 3월 드디어 책 견본이 나왔다. 쿵쿵 뛰는 가슴으로 이를 미국 맥그로힐 출판사와 영국 옥스퍼드대학출판부에 우송했지만 1주일 만에 ‘출판 불가’ 답장이 날아들었다. 영국 블랙웰출판사는 몸소 찾아가 프레젠테이션까지 하고 8개월을 기다렸지만 역시 ‘출판 불가’ 편지를 받았다. “형식이 참신하고 이해하기 쉽긴 한데 디테일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석 달 동안 기진맥진 일손을 놨다가 국내 범문사와 연이 닿아 출판 상담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1주일 만에 ‘작업 불가’ 통보를 받았다.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으로 만든 도표·그림 등 비주얼이 출판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모양이 뒤틀린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그림 전용 프로그램인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를 기초부터 익혀 가며 석 달 만에 제대로 된 비주얼을 완성했다.

결실 견본이 나온 지 1년 반 만인 2004년 9월 마침내 한국인이 저술한 첫 번째 영문 의학 교과서 ‘내과 임상 로드맵(Clinical road map of internal medicine)’ 초판이 국내 출판사를 통해 나왔다. 이를 들고 미국 필라델피아의 엘시비어 출판사로 향했지만 이때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완성도를 더 높여 재도전하겠다는 투지를 불태웠다.

 2006년부터 2판 제작에 들어갔다. 2판 작업엔 세 교수 말고도 무려 122명이 달려들었다. 책 분량도 400여 쪽에서 976쪽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면서 내용이 풍부해졌다. 지난 5월 출간된 2판은 미국의 세계 최대 인터넷서점 아마존닷컴에 등록됐다. 해외 업체들과 출판 계약을 타진하고 있다. 예과 1년생 때부터 우정을 나눠온 이들 세 저자는 공교롭게 2007년 3월 모교 가톨릭 의대의 교수로 동시에 임용됐다. 조 교수와 주 교수는 각각 서울성모병원 내분비내과와 류마티스내과에, 장 교수는 인천성모병원 소화기내과에 재직 중이다.

 “우리도 영문 의학 교과서를 낼 수 있다”(장 교수), “아이디어는 누구나 낼 수 있지만 끝까지 실현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조 교수), “친구들과 같은 꿈을 꿀 수 있어 행복했다”(주 교수)….

 세 의학도의 불굴의 도전이 있었기에 이색 표지(갓 쓴 나그네를 그린 수묵화)의 ‘국산’ 영문 의학 교과서가 처음 탄생했다. 이제 불혹을 바라보는 이들은 “많은 의사가 우리 책으로 공부해 인술을 베풀고 있다는 점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다양한 도식과 사진을 동원해 질환의 증상을 기술, 실제 환자 진료에 큰 도움을 준다는 평이다. 초판 책값이 13만원이나 되지만 4000여 권이나 팔렸다. 의대생들이 사 보는 내과 교과서 중에서 ‘해리슨 책’ 다음으로 많이 팔린 것이다. 17만원 가격표가 붙은 2판도 이미 500여 권 나갔다. 가톨릭의대 본과 4년 김대호씨는 “‘해리슨 책’은 의대에선 ‘수학의 정석’과 같은 책인데 이에 버금가는 책이 선배 의사들의 손으로 집필됐다는 게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글=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사진=박지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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