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일제 지배 정당성 주장에 분노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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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려대 명예교수인 한승조씨가 일본의 우파 잡지 '세이론(正論)'에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는 불행 중 다행"이라는 요지의 글을 기고해 국민을 격분시키고 있다.

한씨는 "만약 한국이 당시 러시아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다면 더 불행해졌을 것"이라는 해괴한 가정을 설정한 뒤 "러시아의 민족 분산정책으로 한민족이 뿔뿔이 헤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전쟁 중 여성을 성적 위안물로 삼은 것은 일본만은 아니었고,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이라고 해석했다. 더 나아가 "한국의 매스컴은 할멈(정신대)들의 행동과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기사를 열심히 보도한다"고 했다. 일제의 대변인이 나타났나 착각할 정도다.

학자나 지식인은 양심과 소신에 따라 사실과 진실을 밝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씨의 이번 주장은 학문적 깊이에서 우러나온 소신이라기보다 만용에 가깝다. 우선 학자로서는 피해야 할 '만약에'라는 가정을, 그것도 잘못된 가정을 논지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일제가 아니면 러시아가 지배했을 것이라는 상황논리 자체도 패배주의적인 데다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한 민족적 상흔의 깊이를 외면한 단순논리에 불과하다. 한반도와 한민족의 역동성을 무시한 단선적 평가일 뿐이다. 한씨는 또 친일파를 단죄하고 과거사 진상을 규명하는 현재의 작업을 '공산주의.좌파 사상에 기인한 것'이라고 몰아붙였다. 좌.우파 를 분류하는 이분법적 사고 자체가 설득력이 없지만 좌파라서 친일파를 공격한다는 등식이야말로 논리의 비약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글은 학계 일각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맥이 닿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이론 역시 민족과 역사.문화.국제관계를 제거한 채 단순히 특정 시기의 경제지표상 발전만을 평가하는 역사 왜곡이라고 지적된 지 오래다. 이번 일은 조국과 민족.역사가 빠진 학문과 사상의 공허함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신경이 예민한 가운데 불거진 한씨의 주장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