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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에 미쳤다, 인종의 벽 넘었다…한인 청년들, ‘빌보드 1위’ 밟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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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론 첫 빌보드 정상…동양인으론 47년 만의 쾌거

21일 아침. j제작팀의 김준술 기자에게서 숨가쁜 문자메시지가 날아옵니다. “에디터, FM이 드디어 빌보드 1위입니다. 자기들이 페이스북에 올렸어요.” 지난주부터 제작팀과 LA중앙일보의 이경민 기자는 생면부지였던 LA의 한국인 주축 힙합그룹 ‘Far East Movement(FM)’를 주시해 왔습니다. LA 한인타운에서 자라고 놀고 음악을 해온 이들이 9주 전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하더니 지난 13일 2위로 껑충 도약한 때문입니다. 지난해 원더걸스가 ‘텔 미’로 76위에 오르면서 국내에서 화제가 됐던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거머쥔다는 건 동양인으로선 그간 불가능했던 47년 만의 ‘사건’입니다.

 #단지 1등이어서가 아니라 이들의 도전과 성공에선 다양한 시대적 의미와 즐거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름부터 ‘동양의 자존심’을 내세운 이들의 음악은 모방이 아닌 ‘자기 일상의 삶’을 개성 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뮤직 비디오엔 막걸리와 소주, 삼겹살, 하이트 맥주, 한국 식당이 등장합니다. 멤버인 노지환씨는 로스쿨을 나왔지만 진정 하고 싶은 일에 올인해 성공을 이룹니다. 인종의 벽을 넘어선 성공에는 차별 없는 인터넷과 소통의 힘이 컸습니다. 동양인의 음악에 편견을 가질까 봐 이들은 유튜브·블로그로 이미 수많은 팬을 만들어 놓습니다. 핫 100의 2위 당시 디지털 분야에선 이미 1등일 정도였으니까요. 주말 아침 j가 준비해 온 이들의 스토리를 ‘1위’의 제목으로 전하게 돼 신났던 시간들이었습니다.

 #20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자신의 도록집을 발간한 배우 김지미씨의 『영화, 삶과 사랑』을 3개 면(4∼6면)에 걸쳐 담았습니다. 몇몇 신문에 김씨의 기사가 난 터인 데다 대개는 ‘남의 신문’에 난 건 크게 쓰지 않는 게 신문의 관행이었습니다. 하지만 j의 김지미씨 팬을 위해 오히려 더 취재와 편집·사진·디자인에 시간과 공, 새로움을 보태려 노력했습니다. ‘j의 김지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최훈 중앙일보 j 에디터


4인조로 구성된 FM. 왼쪽부터 정재원, 케브 니시, DJ 버맨, 노지환.

이번주 빌보드 1위 등극한 ‘파 이스트 무브먼트’ … 아시안 가수는 미국서 성공 못한다는 편견을 깼다

겁 없는 한국인 청년들이 철옹성과 같았던 ‘빌보드 차트 1위’를 거머쥐는 쾌거를 이뤘다. 힙합·재즈·댄스 같은 하위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 게 아니다. 모든 싱글 곡(曲)을 대상으로 순위를 매기는, 그래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핫 100(Hot 100)’ 차트에서 금메달을 움켜쥐었다. 한국인으론 최초다. 동양인으론 일본의 남자가수 규 사카모토 이후 47년 만이다. 그는 일본 요리 이름인 ‘스키야키(Sukiyaki)’란 노래로 1963년 3주간 같은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미국에서도 화제인 돌풍의 그룹 ‘파 이스트 무브먼트(Far East Movement·이하 FM)’를 LA에서 j가 단독으로 만났다. 빌보드는 21일(현지시간) 홈페이지를 통해 “FM이 4주간 1위였던 브루노 마스를 제치고 이번 주 정상을 차지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거침없는 청년들은 인터뷰에서 ‘도전과 성취’를 넘어 ‘디지털 미래’까지 이야기했다. “우리 성공은 인종·국가·성별을 넘어 인터넷을 통해 맘껏 원하는 콘텐트를 향유하는 ‘세대의 힘’ 덕분”이라고 말이다.

LA중앙일보=이경민 기자 rachel@koreadaily.com,
사진=김상진 기자 sk1015@koreadaily.com

FM은 4인조다. 한국인 프로그레스(Prohgress·제임스 노·한국명 지환)와 제이-스플리프(J-Splif·제이 정·한국명 재원)는 8개월, 일곱 살 때 이민 왔다. 케브 니시는 중국·일본계, DJ 버맨은 필리핀계다.

● 어떻게 그룹을 만들었나요.

 “처음엔 그냥 재미로 음악을 만들어서 인터넷에 올렸죠. 그걸 들은 사람들이 쓴 댓글을 보고 좋아하는 게 전부였고요. 어쩌다 공연할 기회가 있으면 저희가 직접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고 다니면서 홍보를 했어요. 그러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연 활동을 시작했고 3, 4년이 지나면서 더 진지하게 음악을 해야겠단 결심을 했습니다. 직업적으로 음악을 고민한 거죠. 2008년 무렵 저희 모두가 팬이었던 DJ 버맨에게 팀을 이루자고 제안해 지금의 모습이 갖춰졌어요.”(노지환)

 “모두 LA 한인타운 근처에서 자란 친구예요. 처음엔 그냥 음악팬이었죠. 마이클 잭슨, 에미넴, 스매싱 펌킨스, 너바나 …. 팝이며 힙합·댄스·재즈·펑크까지 가리지 않고 들었어요. 그러다 2002년 무렵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면서 TV보다 큰 PC 모니터를 들고 다니며 동네 주차장이나 집 부엌에서 우리 일상에 관한 노래를 만들었죠. 한인타운 고깃집에서 저녁 먹고, 늦은 밤엔 타코 트럭에서 야식도 먹고, 클럽에 가서 신나게 음악을 즐기고 노는 생활에 관한 노래였어요. 그 뒤로 꾸준히 데모 앨범도 만들고, 크고 작은 공연을 하다 오늘까지 온 거죠.”(케브 니시)

 ※ LA 한인타운에서 공연하는 그들을 보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라이크 어 G6(Like a G6)’라는 싱글 곡(曲)으로 빌보드의 ‘핫 100’ 차트 1위에 오를 줄은 말이다. 멤버들 스스로도 “웹사이트에 오타가 난 줄 알았다”고 할 만큼 믿기 힘든 열매였다. ‘핫 100’은 ‘라디오 방송+음반 판매+온라인 다운로드’를 더해 장르를 따지지 않고 모든 싱글의 종합 순위를 매긴다. 이 때문에 여러 빌보드 차트에서 으뜸으로 친다. 지난해 원더걸스가 한국 가수 최초로 ‘핫 100’의 76위에 올라 자랑스럽다는 소릴 들었다. FM은 9주 전 차트에 진입, 승승장구해 10위권에 들더니 1위 자리까지 차지했다.

● ‘파 이스트 무브먼트’란 팀명이 특이합니다.

 “처음엔 익명의 래퍼(rapper·emcee)를 뜻하는 ‘엠시스 어노니머스(Emcee’s Anonymous)라고 팀명을 지었어요. 아시안계가 힙합을 한다고 떳떳이 드러내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 정체성을 드러내기 두려워하는 겁쟁이 같은 이름이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다 2006년 만든 노래의 제목을 따서 ‘파 이스트 무브먼트’로 바꿨습니다. 극동(Far East)이란 단어를 넣어 아시안으로서 자부심을 드러내자는 취지였죠.”(케브 니시)

● FM 음악의 특징이 궁금합니다.

 “요즘 친구들의 아이팟(MP3 플레이어)에 저장된 곡 목록을 보면 너무 다양해요. 어떤 장르도, 스타일도 안 따지죠. 모두가 그냥 ‘팝 애호가’일 뿐이죠. 저희 앨범에도 힙합·재즈·댄스·록이 맘껏 뒤섞인 ‘얼터너티브 팝’ 스타일의 곡이 많아요. 그게 젊은 세대의 취향과 맞아떨어진 것도 같아요.”(노지환)

 “저희 음악은 ‘삶의 양식’ 자체예요. LA에 살다 보면 백인·흑인·라틴권 문화는 물론 한국·태국·베트남·중국 같은 많은 아시아 나라의 고유한 문화까지 배우고 익혀요. 그 모든 문화들이 통합돼서 저희 것이 됐다고 생각해요. 또 그런 다양한 사람들이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자연스럽게 보고 알아왔고요. 저희의 음악은 이 모든 경험과 취향을 한데 끌어안아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케브 니시)

● 구체적으로 음악적 영감을 어디서 얻나요.

 “클럽에 가서 음악을 즐기는 건 저희의 일상이에요. 하루에 3, 4곳의 다른 클럽을 돌아다니는 것도 예사입니다. 클럽에 가는 건 단순히 노는 게 아니라, 일종의 ‘리서치’ 작업이죠. DJ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미치게 하는가 보는 건 진짜 멋진 일이에요.”(노지환)

 “블로그도 영감의 원천이죠. 블로그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음악을 다운로드 해서 듣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알아보는 게 음악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인터넷 세상 속의 사람들 반응은 정말 빨라요. 그런 반응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죠.”(케브 니시)

# 로스쿨에서 힙합 무대로

‘먹고, 마시고, 노는 게’ 에너지가 됐다는 젊은이들. 그렇다고 이들의 삶이 흥청망청 방탕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FM의 두 한인 청년은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다. 한인타운 대형 교회에서 자선공연도 여러 번 펼쳤다. 마약 퇴치를 위한 음악인 행사, 불우 아동을 위한 음악 교육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노지환은 UCLA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로스쿨을 다니며 변호사를 꿈꾸는 학생이었고, 정재원은 평범하고 성실한 회사원이었다. 그러나 저녁 시간엔 힙합 뮤지션으로 ‘변신’해 꿈을 키워갔다.

● 음악 하는 데 부모님 반대는 없었습니까. 가수 된다고 얘기하는 건 교육열이 강한 한인 문화에서 쉽지 않은데요.

 “반대했죠. 사실 저희 부모님은 모두 음악인이세요.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아버지는 한인 라디오방송의 진행자이자 성악가·지휘자시죠. 어릴 땐 부모님을 따라 악기도 배우고 합창단 활동도 했어요. 그러나 부모님은 음악의 길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제가 로스쿨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저랑 눈도 안 마주치려 했어요. 그래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가져야겠단 생각에 계속했죠. 요샌 부모님이 더 자랑스러워하세요. 로스쿨요? 결국 졸업하고 학위까지 받았어요. 음악을 안 해도 먹고살 게 있어서 든든하긴 하지만, 학자금 융자 받은 게 너무 많아서 골치 아파요. 하하.”(노지환)

 “저는 부모님께 음악 한다는 얘길 전혀 안 했죠. 아주 실망하실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3년 전쯤 제가 한인 TV에 나온 걸 보시고 아셨죠. 어느 날 저희 기사가 게재된 한인 신문을 가져오시기에 꾸중하실 줄 알았는데 신기해하며 좋아하시더라고요. 지금은 CD 나오기도 전에 미리 주문까지 해놓으시고 멤버들 사인까지 부탁하세요.”(정재원)

 ※ FM은 지난 12일 공식 데뷔 앨범인 ‘프리 와이어드(Free Wired)’를 내놓았다. 그 덕에 ‘Like a G6’의 인기도 더욱 불이 붙었다. 특히 음반은 레이디 가가와 스팅·U2를 거느린 막강한 회사 인터스코프(Interscope)의 한 브랜드인 체리 트리를 통해 발매됐다. 멤버들은 평소 이 회사를 ‘음반계의 하버드’라 부르며 동경했다. 스눕 독과 원 리퍼블릭 같은 쟁쟁한 음악인들도 앨범에 참여했다.

● 인터스코프 대열에 합류한 소감이 남다를 텐데요.

 “그냥 ‘초현실적’이에요. 저희 우상과도 같던 퀸시 존스와 윌 아이 엠 등과 파티도 같이하고 영화도 보러 다니니 말이죠. 사인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그럴 수 없는 분위기라 아쉬워요. 저희에겐 축복이죠.”(노지환)

# 오바마도 대통령 됐는데 우리라고

● ‘프리 와이어드’란 무슨 뜻인가요.

 “인종과 성·장르를 넘어 세계가 하나로 연결됐다는 뜻이죠. 인터넷에선 차별 없이 어떤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먼저 알게 되고 이를 중요하게 따집니다. ‘사회적 편견’이 없는 거죠. 저희 음악도 그래요. 사람들이 저희 음악에 편견을 갖기 전에 유튜브·블로그로 홍보를 하고, 대화를 나누며 엄청난 친구와 팬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친구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FM의 음악과 스타일을 얘기하고 즐겼어요. 어느 순간 그 반응은 저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폭발적으로 커져 있었죠. 인터넷은 우리의 음악을 익명의 수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게 도와준 겁니다.”(정재원)

● 같은 회사 소속이자 파격적 행보로 유명한 가수 ‘레이디 가가’의 공연 때 오프닝 무대에 섰던 경험은 어땠나요.

 “진짜 많은 걸 배웠어요. 또 수만 명의 관객이 열광하는 앞에서 공연한다는 것도 멋진 경험이었고요. 레이디 가가는 정말 겸손하고 멋진 여성입니다. 항상 저희를 무대 뒤편이나 스튜디오로 불러 챙겨주고 ‘언제나 너희다워야 한다’고 조언해 줬어요.”(정재원)

● 이젠 아시아계가 힙합을 하는 것에 편견이 없다고 봅니까.

 “처음에만 해도 야유를 많이 받았죠. 접시를 집어 던지는 사람도 있었고요. 하지만 저희 귀엔 그런 야유가 안 들렸어요. 그런 걸 신경 쓸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이제는 세대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봅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고, 아시아계 댄스팀인 퀘스트 크루가 미국 최고의 비보이팀으로 인정받는 시대예요. 실제 이름보다 인터넷 아이디가, 어떤 인종이냐보다 얼마나 좋은 음악을 하느냐가 중요한 시대이기도 하죠. 저희가 바로 그 증거 아닐까요?”(노지환)



“여자 친구도 할머니도 춤추게 … ” LA 타임스 ‘타고난 친근감’ 극찬

“아시안계 미국인 가수는 전미(全美)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부순 사례다.”

 LA 타임스의 음악평론가 제프 와이스는 15일자 기사에서 FM을 이렇게 평했다. 그들의 성공 비결은 ‘타고난 친근감(innate affability)’이라는 주석도 달았다. 특히 FM의 음악을 놓고 “전염성 강하고 공격적이지 않으며, 체리 보드카처럼 달콤한 후렴구와 일렉트로풍 분위기가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며 “당신의 여자친구와 할머니를 모두 춤추게 만들 앨범을 내놓았다”라고 극찬했다. 까다로운 현지 전문가들도 FM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US매거진은 FM이 첫 데뷔 앨범을 내놓은 뒤 게재한 18일자 기사에서 “자석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음악으로 위대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라고 보도했다. ESPN도 최근 멤버들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만의 삶이 녹아든 FM의 음악세계를 전했다.

 원래 힙합은 흑인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한국에서도 힙합 음악을 하는 이들에겐 ‘목소리와 필(feel)이 흑인 같다’는 게 최고의 찬사였다. 1990년대 말 ‘백인 에미넴(힙합가수)’의 등장은 그래서 파격적이었다. 물론 아시안계의 입지는 극히 좁았다. 그러나 FM은 이런 통념에 과감히 도전했고, 성공을 거뒀다.

  다만 FM이 ‘반짝 성공’에 그치지 않으려면 안주하지 않는 노력, 플러스 알파의 음악성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임진모 팝칼럼니스트는 “곡이 재미있고 춤추기 좋다는 게 성공 포인트인 것 같다”며 “그러나 잘못하면 1곡의 히트곡을 내놓고 사라지는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j 칵테일 >> 비틀스·마이클 잭슨·마돈나…빌보드‘핫 100’1위엔 돈·명예 따라와

‘순위’를 매기는 일은 골치 아프다. 옥에 티만 나와도 뒤에서 수군거린다. 그런데 빌보드는 ‘순위 비즈니스’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굴지의 가수들도 이름 도장을 찍으려고 애를 쓴다. 비틀스도 1964년 “I Want to Hold Your Hand (7주)”를 시작으로 70년까지 무려 20곡을 1위에 올려 놓았고, 세계적 그룹으로 도약하게 됐다. 팝의 왕(King of Pop)으로 불리는 마이클 잭슨은 ‘Billie Jean’을 포함해 13개의 1위 곡을 내놓았고, 마돈나도 두 번째 앨범인 ‘Like a Virgin’이 빌보드 앨범 차트 200위의 정상을 차지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렇게 쟁쟁한 빌보드 차트에서 한국 청년들이 주축인 FM이 ‘왕관’을 차지한 것이다.

 빌보드가 왜 그렇게 대단한 걸까. 1884년 미국에서 옥외광고 업계지(誌)로 출발한 빌보드의 최대 무기는 ‘공신력’이다. 빌보드 코리아의 이희석 이사는 “핫 100 차트의 경우 모든 장르에 걸쳐서 닐슨사(社)의 사운드스캔과 브로드캐스트 데이터(BDS) 시스템으로 각각 음반 판매 실적, 라디오 방송 선호도 등을 집계한 뒤 온라인 음원 공급사가 제공하는 다운로드 자료까지 더해 순위를 낸다”고 말했다. 왜곡을 줄이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경로로 인기도를 조사한다는 얘기다. 70개가 넘는 빌보드 차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FM이 이번에 1위를 차지한 ‘싱글 100위(Hot 100)’와, ‘앨범 200위(Billboard 200)’다. 이 차트 1위에 오르면 부(富)와 명예가 모두 따라온다. 빌보드 코리아는 “1위를 했을 때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지는 가수마다 편차가 크고, 팔리는 CD 가격도 다 달라 일률적으로 추정하긴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은 소매 기준으로 음악 시장 규모가 85억 달러(약 9조6000억원)에 달해 세계 1위다. 빌보드 1위 등극을 하면 이런 시장의 소비자들을 대거 붙잡을 수 있다.

 그만큼 차트 진입 경쟁도 치열하다. 미국 노동부 통계국에 따르면 미국에서만 가수와 대중음악 연주자들이 19만 명에 달한다. 집계에 안 잡히는 가수 지망생에 타국 음악인까지 더하면 빌보드 진입은 그야말로 ‘바늘 구멍’이다.

 지금까진 일본 기획사인 에이벡스를 통해 데뷔한 한국 출신의 여가수 ‘밍크(MINK)’가 2006년 4월에 ‘핫 댄스 클럽 플레이’라는 하나의 하위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게 고작이었다. 1959년 2월엔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을 하던 김시스터스가 R&B, 팝 차트 2위에 오른 적이 있다.

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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