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잡힌 외환 정책] 上.<메인> 외환보유액 세계 4위국의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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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보유액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정부와 한국은행은 달러화 유입을 가능한 한 줄이려 애쓰고 있지만 현재로선 묘안이 없다. 수출 호조와 외국인의 국내 증시 투자 지속으로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화가 물밀듯 국내로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외환시장에서 달러의 공급 초과 규모도 하루 평균 1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흡수하기 위해 정부와 한은이 외환시장에 개입하면서 지난해 달러화는 437억달러나 증가했다. 하지만 시장 개입의 효과는 떨어지고 부작용은 커지고 있다. 지난주 세계 외환시장을 강타한 '한은 쇼크'의 원천도 한은이 보유한 세계 4위 규모의 외환 때문이었다. 외환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한은이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추진키로 한 보유 통화의 다변화 계획을 시장이 달러화 매각으로 받아들이면서 달러화 급락 사태를 불러 온 것이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외환 부족 사태 때문에, 지난해부터는 넘치는 외환으로 국제 외환시장의 요주의 대상으로 떠오른 셈이다.

◆ 왜 많아서 문제인가=외환보유액이 2000억달러를 돌파하면서 외환 보유의 목적인 대외 지급능력은 크게 개선됐으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외환보유액이 대규모로 불어나면서 환율 안정을 위한 완충 기능이 크게 약화됐다는 점이 우선 문제다. 외환시장에 달러가 넘치면 달러화 매입을 통해 환율 안정에 나서야 하지만 관리 비용과 운용에 부담이 생기면서 넘치는 달러화 매입에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수출 기업들의 안정적인 경영에 치명적이다. 한은의 달러화 흡수 능력이 떨어지면서 강력한 개입이 불가능해 환율 하락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환율이 급락하면 기업들은 달러로 벌어들인 돈을 원화로 환전하면서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된다. 예컨대 지난해 1144원을 기록한 연평균 환율이 올해 1044원으로 하락한다면 기업들은 달러당 100원의 수익을 허공에 날려보내게 된다.

이 같은 환차손은 외환보유액에서도 발생한다. 2002억달러 가운데 미국 달러화 표시 외환보유액이 많게는 1600억달러(80% 가량)로 추정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1년 동안 원화 환산 가치로는 16조원(달러당 100원×1600억달러)의 손실이 발생하는 셈이다. 수출 경쟁력이 훼손되는 것도 문제다. 원화가치 상승(환율 하락)은 한국산 제품의 가격 상승을 초래한다.

◆ 외환시장 불안 가중=환율 하락에 따른 기업들의 수출 불안은 외환시장으로 이어진다. 결제 통화의 80%를 달러화에 의존하는 기업들이 외환 동향에 민감해져 달러화를 사들이거나 팔면서 외환시장은 하루에도 수차례 가파른 등락을 거듭한다. 한은발 쇼크가 세계 외환시장을 흔들었던 지난주 서울 외환시장에서도 달러화 팔자가 폭주하면서 원-달러 환율은 22일 하루 만에 17.2원이나 폭락했다.

이렇게 외환시장이 불안해지면서 일시적인 가격변동을 틈타 차익을 얻고 빠져나가는 핫머니와 헤지펀드 등 전문투기꾼들까지 국내 외환시장을 노리고 있다. 세계적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의 앤디 시에 박사는 최근 국제 외환시장에서 환율이 급락하자 "헤지펀드가 한국과 대만 외환시장의 공략을 가시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정욱 우리은행 딜러는 "국내 외환시장은 달러 공급이 많기 때문에 헤지펀드 등 외부 세력의 공격에 취약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헤지펀드의 속성상 정확한 규모가 파악되지는 않고 있지만 지난주 환율이 급락했을 때도 상당한 규모의 달러화를 처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했다.

◆ 개입 한계 드러낸 외환당국=외환 유입이 지속되면서 정부와 한은은 그동안 환율 안정을 위해 달러화를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문제는 관리 비용이다. 환율 안정을 위해 시중에 풀린 원화를 흡수하면서 발행한 통안채의 이자가 연 5조원에 달하고, 외환시장안정용 국고채(환시채)는 이미 올해의 발행 한도 중 30%를 소진했다. 이미 환율 방어를 위한 '실탄'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얘기다. 더구나 달러화 매입으로 시중에 풀린 자금은 금리 상승으로 이어져 물가 상승을 자극하는 부작용도 초래한다. 달러화 약세 기조가 당분간 고착화하고 있는 것도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달러 가치 하락의 직접 원인인 미국의 쌍둥이(재정.무역) 적자 해결 없이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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