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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나면 새 레퍼토리, 다 소화하는 16세 ‘괴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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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국 클래식 음악의 기대주인 피아니스트 조성진군은 올해 수십 곡을 연주했다. “열 곡 정도는 특별한 준비 없이도 앙코르로 칠 수 있다”고 한다. 성장기 피아니스트답게 음악을 빠르게 소화하며 자라고 있는 ‘괴물’이다. [최승식 기자]

‘잘’ 치는 건 별 자랑이 못 되는 시대다. 빠른 손가락, 튼튼한 팔에 서정성까지 갖춘 피아니스트가 넘쳐난다. 하지만 조성진(16)군의 행보는 그 사이에서도 화제다. 훌륭한 연주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작품을 들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연주 스케줄부터 남다르다. 지난해 11월 일본 하마마쓰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 한 후 드라마틱하게 바빠졌다.

지난해 12월에 라벨 협주곡 G장조를, 올 4월에 차이콥스키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이후 일본에서 네 번의 독주회를 열었다. 두 시간 프로그램이었다. 7월에는 세 번의 독주회를 했다. 놀라운 건 4월과 7월 프로그램이 한 곡도 겹치지 않았다는 점. 그런데도 정해진 연주곡이 끝나면 여섯 곡씩 앙코르를 했다.

 한국 연주 일정도 빡빡하긴 마찬가지다. 지난 여름에는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멘델스존을 들려줬다. 이달 25일에는 리스트의 협주곡 ‘저주’를 연주한다. 곧이어 다음 달 초 서울시향·정명훈과 베토벤 협주곡 4번을 협연한다.

 대형 작품인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무대에서 연주하기까지 꼭 두 달이 걸렸다. 악보를 처음 받아 읽고, 외워 연습하고 음악을 다듬기에 성인 연주자에게도 부족한 시간이다. 다음 달 협연하는 베토벤 또한 처음 연주해보는 작품. 스승인 피아니스트 신수정씨는 “곡 익히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혀를 내두른다.

 ◆순발력과 집중력=어떻게 이런 속도로 음악을 익히는 걸까. “악보를 처음 보자마자 바로 완벽하게 치는 능력은 없어요.” 열여섯 소년은 우선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봄,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의 앙코르에서 즉흥으로 나눠준 악보를 척척 연주해냈던 피아니스트다. 타고난 화성 감각과 순발력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쇼팽 작품의 조성을 장조에서 단조로 바꿔 쳐보면서 놀곤 해요. 하지만 이건 그냥 재미로 하는 건데….”

수줍어하며 한 말이지만, 주어진 작품을 기계적으로 연습하는 단계는 이미 벗어나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다른 재주는 집중력이다. “그건 좀 있는 것 같아요. 남들보다 오래 앉아있지는 못하지만 짧은 시간에 빠져들어 연습해요. 친구들은 열두 시간 넘게 연습한다고 하는데, 저는 예닐곱 시간 정도가 최대에요.” 대신 혼자 대형서점을 찾는 일이 잦다. 음악 서적을 탐닉하고 각종 자료도 찾는다. 건반 위에서만 놀기엔 목이 많이 마른 소년이다.

 ◆“10년 안에 40곡”=그런 그가 갑자기 신신당부를 한다. “저, 작품을 너무 빨리 배워서 연주한다는 말은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 공연 때마다 들었던 말이리라. “몇 달 만에 대곡을 연주한다고 하니까, 꼭 깊이도 없이 치는 것 같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해줄 때마다 칭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수줍게 걱정을 털어놨다. 반짝하는 천재 소년으로 남고 싶지 않다는 굳은 심지가 보였다. 그렇다고 새 작품을 ‘흡수’하듯 익히는 속도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10년 안에 웬만한 피아노 협주곡을 다 연주하는 게 목표”라고 하니 말이다. 브람스·생상스·슈만 협주곡 등 아직 그가 자기 음악으로 만들 작품이 많다. “앞으로 칠 40여 곡의 목록이 머릿속에 있다”고 한다. 그 덕에 피아노 음악의 팬들은 적어도 10년간 심심할 일이 없겠다.

글=김호정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조성진 협연 무대=25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와 협연. 02-599-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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