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칼럼] 3·1절에 다시 생각해 보는 통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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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0년, 분단 60년을 맞는 올 3.1절에는 무엇보다 민족통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당장 눈앞에 닥친 북한 핵문제 때문이라기보다 100년 가까이 우리를 묶어두고 있는 민족적 비운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우리의 선조들이 터뜨린 독립운동의 열기는 45년 일제의 패망으로 35년에 걸친 식민지로부터 광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어 우리는 국토와 민족의 분단이라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비극을 또다시 맞게 되었다. 식민지 35년, 분단 60년을 합한 9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우리는 통일된 독립국가를 갖지 못하고 살아왔다. 이런 우리의 슬픈 역사가 100년을 넘지 않도록, 즉 5년 후인 2010년을 지나기 전에 3.1운동에서 비롯된 민족의 대행진이 민족통일로 마감될 수 있는 역사적 계기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국민통합은 민족통일로 향한 전제조건이며 필요조건이다. 3.1 독립선언이 '2000만 민중의 성충(誠忠)을 합하여' 포명되었듯 통일노력은 4800만 국민의 뜻이 모아졌을 때만 그 성공을 기약할 수 있다. 애국심의 경쟁이나 통일세력과 반통일세력으로 국민을 양분하는 소아적(小兒的) 작태는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통일을 원하고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통일노력은 전개돼야 한다.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 할 최대의 걸림돌은 분단 상황의 장기화와 혼돈을 틈타 국민의식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통일에 대한 체념과 무관심이다.

첫째, 통일에 대한 국민의 열정을 식혀버리는 통일비용론의 확산을 경계해야 한다. 과거에 흔히 지적됐던 이른바 기득권에 대한 집착이나 공산화에 대한 공포보다 통일이 가져올 막대한 비용과 이로 인한 경제의 파탄, 생활수준 저하에 대한 우려가 많은 국민을 통일에 대해 주저하게 만들고 있다. 유럽 최강의 경제대국이었던 서독이 통일 후에 겪고 있는 경제적 시련을 우리 국민은 예사롭지 않게 바라보고 있다. 구 동독과는 비교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극심한 경제파탄과 체제 고립으로 허덕이는 북한의 실상을 접할 때마다 통일에 대한 우리 국민의 감정이 착잡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통일비용에 대한 과도한 우려는 보다 큰 역사적 손익계산을 그르칠 위험이 크다. 아마도 우리는 독일보다 훨씬 많은 통일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60년간 독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막대한 분단비용을 계속 치러오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한시라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쟁으로 말미암은 엄청난 희생, 그리고 분단 60년째인 지금도 100만 대군이 휴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는 낭비만 꼽더라도 우리의 분단비용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3.1 독립선언서가 일제 강점으로 말미암은 민족의 수모와 피해를 열거했듯이 오늘의 우리는 60년간 계속되는 분단이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민족의 발전과 도약을 얼마나 저해하고 있는지를, 즉 엄청나게 지불되고 있는 분단비용에 대해 되새겨 봐야 한다. 언젠가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비용 때문에 갈라졌던 가족과 민족의 결합을 주저하거나 지연시키는 몽매한 민족이 아님을 우리 스스로 다짐해야 될 것이다.

둘째, 늘 큰소리로 통일을 외치면서도 국가경영이나 정치활동의 일상적 차원에선 이를 슬그머니 외면해버리는 편의주의의 만연도 경계해야 한다. 예컨대 수도 이전 또는 행정도시 건설의 문제는 찬반 입장을 떠나 일단 통일에 대한 국가적 비전과 연계시켜 논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20~30년이 소요되는 계획을 세우면서도 그동안에 통일은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는 적당주의나 통일문제와 연계돼 이전 논의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을 우회하려는 편의주의를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통일부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역할에 얼마나 큰 무게가 실어지고 있는지 걱정된다.

독일통일이 우리에게 보여준 교훈이 있다면 통일은 예상외로 빨리 또는 갑자기 들이닥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올 3.1절에는 그 교훈을 되새기며 겨레의 앞날을 가늠하는 것이 시운에 순응하는 길일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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