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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땀 흘리며 함께 공격·방어 … 그 처녀, 소싸움판을 휩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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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충북 보은에서 싸움소를 기르는 곽현순씨가 최근 경남 진주서 열린 민속소싸움 병종 경기에서 우승한 자신의 소 ‘영광이’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자도 견뎌내기 힘들다는 소싸움 판에서 데뷔 2년 만에 전국을 제패한 20대 여성. 주인공은 충북 보은군 산외면 곽현순(27)씨. 곽씨는 6~11일 경남 진주에서 열린 민속소싸움대회에 4살짜리 ‘영광’과 ‘합천’을 출전시켜 병종(600~660㎏)급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했다. 
소의 주인이기도 한 곽씨는 대회 전 주변 사람들로부터 “시집도 안 간 아가씨가 어떻게 거친 소싸움 판에 끼어드느냐”는 비웃음을 받았지만 우승으로 그들의 놀림을 잠재웠다.

100여 마리의 한우를 기르는 농장에서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축사를 드나들며 덩치가 산만한 소와 가깝게 지냈다.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2년 전 “싸움소를 키우겠다”며 아버지 곽종국(52)씨를 따라 소싸움꾼으로 변신했다. 

그의 결정에는 어릴 적부터 친구처럼 지내던 한우에 대한 애정이 큰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 이순복(55)씨가 교통사고로 농장 일을 못하게 되자 대신 농장을 관리하게 된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목장에서 눈매가 날카롭고 골격이 우수한 소를 고른 그녀는 매일 영양식과 보약을 먹이면서 근력과 지구력을 키우는 고된 훈련을 통해 마침내 8마리를 싸움소로 변신시켰다.

그는 2008년 가을 청주에서 열린 한우사랑축제 초청 경기 때부터 우주(牛主·싸움소 주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눈싸움만으로도 시합이 끝나기도 하지만 많게는 1시간 이상 싸움이 진행되는 소싸움은 싸움 소도 대단한 체력을 요구하지만 여자인 그에게도 벅찬 일이었다. 

곽씨는 “커다란 소들이 자웅을 겨루고 승부를 지켜보며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이 견뎌낼 수 있던 비결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곽씨와 호흡을 맞춰 우승한 영광이(4·수컷)는 넉 달 전 싸움소로 구입해 한 달 정도밖에 훈련을 못했지만 20~30년 소싸움 판에서 활동한 남자 우주들을 누르고 우승했다. 

긴장과 박진감이 넘치는 싸움판이지만 그녀는 키 162㎝의 아담한 몸집으로 경기장에 올라 고성을 지르면서 싸움을 이끈다. 자신의 소가 공격할 때는 이름을 연호하면서 격려하고 방어에 나설 때는 호흡을 늦춰주는 방식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해준다.

그러다 보니 한차례 경기를 치르고 나면 그녀나 소나 땀으로 범벅이 되기 일쑤다.

현재 소싸움판에 정식으로 등록된 여성은 그녀를 포함해 3명. 그러나 10여 년 경력의 ‘안창아줌마’라는 별명으로 최근까지 활동했던 50대 여성을 제외하면 실제 경기에 출전하는 여성은 그녀가 유일하다.

곽씨는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면 시집가겠다고 아버지와 약속했지만 이왕 이 바닥에 이름을 낸 이상 민속씨름의 백두급에 해당하는 갑종 경기까지 제패한 뒤 약속을 지킬 것”이라며 “소처럼 우직한 사람을 만나 소를 테마로 한 목장을 경영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보은투우협회는 전국대회를 석권한 그녀의 소들을 환영하기 위해 13일 보은읍 시가지에서 카퍼레이드 등 환영행사를 열었다.

신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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