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lmuny : 용기 있는 여성들에게 바치는 헌사 <1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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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초대형 걸개를 만들어 광화문광장에 거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세계인의 보편적인, 혹은 특별한 가치와 꿈을 담는 게 목표다. 일본에서도 이 프로젝트는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한 단어를 만나게 된다. Halmuny. 국치 100주년인 올해 열리는 G20 정상회의. ‘국치’와 리더급 국가 ‘G20’. 그 이격감은 곧 우리의 감동일 것이다. 하지만 국치는 제대로 치유되지 않았다. Halmuny가 그 부끄러움을 일깨웠다.

피해자 할머니를 위해 봉사하는 일본인 아야(26)가 김학순 할머니의 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 [최승식 기자]

지난달 16일 일본 오사카역.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활동 중인 니시무라 수미코(58·여)를 만났다. 그녀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1991년 여름이었어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가 TV에서 증언을 했죠. 그걸 보고 남편이 ‘저 여자들 돈 받고 한 거다’, 이러는 거예요. 할머니(Halmuy)에 대한 세상의 시선을 옮긴 말이었죠.”

수미코의 일본어에서 ‘할머니’란 한국어 발음이 튀어나왔다. 왜 오바상(おばあさん)이 아니라 할머니일까. 국제사회에서 ‘Halmuny(알파벳 표기)’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의 어머니, 따뜻함과 고향을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우리말이 어떻게 ‘위안부 피해자’를 칭하게 됐는지….

수미코의 기억 속에 있는 1991년 8월 14일. 소복을 입은 여성이 내외신 기자 앞에 섰다. “나는 정신대(당시에는 위안부라는 표현조차 쓰이지 않았다)였다.” 그녀는 과거를 얘기했다. 실명과 얼굴을 밝히고 위안부를 폭로한 첫 사건이었다. 주인공은 김학순(당시 67세, 97년 작고) 할머니였다. 그해 일본 정부의 망언이 이어졌다. “정신대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했고 우리 정부는 개입하지 않았다.” 말이라고 할 수도 없는 말이, 가해자의 입에서 저항 없이 터져 나왔다. 피해자의 산발적 분노는 힘이 없었다. 김 할머니는 1939년, 17세 나이에 평양역에서 일본군에게 납치됐다. 그날 일본 장교에게 성폭행 당했다. 중국 각가현에서 하루 7~8명의 일본군을 받았다. 생리 때도 받았다. 피가 새나오지 않게 솜을 깊이 말아 넣고 받았다. 그녀는 조선 남자의 도움으로 위안소를 탈출했다. 그 남자와 살았고, 아이 둘을 낳았다. 남자는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를 기억에서 지우지 못했다. 술만 마시면 “갈보짓 한 년”이라고 했다. 그녀는 6·25전쟁에서 남편과 아이 둘을 모두 잃었다.

성(性)이라는 윤리적 금기 속에서 ‘김 할머니’들은 숨어 살았다. 한(恨)의 크기만큼이나 공개 증언의 후폭풍은 거셌다. 용기는 전염됐고, 많은 할머니들이 증언에 동참했다. 중국과 대만·필리핀, 심지어 네덜란드 할머니까지 공개 증언에 동참했다. 세계 곳곳의 피해자와 활동가들이 한국을 찾았다.

이때부터 ‘호칭’에 대한 문제가 불거졌다. 종군(누가 누굴 따라갔고) 위안부(누가 누굴 위안했으며), 정신대(挺身隊, 누가 앞장서서 나갔단 말인가). 어떤 단어도 적절하지 못했다.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 할머니들에게 물었다.

“늙었으니까 그냥 할머니라고 불러줘.”

할머니. 노인 혹은 grandmother란 뜻. 아픈 역사를 먼저 살아온 사람. 우리 고향에도 저런 할머니는 있었다는 자각. 그들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까지. 이런 고민 속에 ‘Halmuny’란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92년 8월 유엔 증언 때부터다. 공식 문서엔 victim(피해자)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그 영향으로 필리핀에선 ‘로라(할머니란 뜻)’, 대만에선 ‘아마’란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수미코는 “이 호칭은 한국 여성의 주체성과 용기에 대한 존경을 담고 있다”고 했다. “우린 이 말이 오바상을 의미한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다”고도 했다. 갈보년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김 할머니, 그녀는 정갈했다. 다 읽은 신문과 책도 새것처럼 어긋남과 구김이 없었다. 주변은 깨끗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잘 나서지 않았다. 주위에선 그녀의 폭로를 놀라워했다. “돈보다 사과가 중요하다”고 말해 일부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매달 5만원을 남몰래 불우이웃을 위해 썼다(딸처럼 가까웠던 이희자(63)씨 증언). <2회에 계속>

글=강인식 기자, 오사카=김효은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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