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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착 감기는 싱그러운 숨결, 시대 앞서간 ‘재즈의 피카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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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호 05면

1 비밥 재즈의 명인 넷이 1948년 뉴욕의 로열 루스트 무대에 섰다. 왼쪽부터 찰리 파커(알토 색소폰), 파릇파릇한 스물둘의 마일스 데이비스(트럼펫), 앨런 이거(테너 색소폰), 카이 와인딩(트롬본). 훗날 앨런 이거가 이렇게 말한 적이있다. “마일스는 꽤 수줍음이 많은 친구였습니다. 반면 상당히 건방지기도 했고요. 아무렴 그는 최고였으니까요.”

일본의 백드롭 명수인 안토니오 이노키를 로프 반동시켜놓고 박치기, 드롭킥, 코브라 트위스트, 넉사자 굳히기로 원 투… 원 투 스리 땡땡땡~.

박진열 기자의 음악과 ‘음락’ 사이- 마일스 데이비스 ‘Milestones’ 앨범(1958)

흑백 TV 시절, 눈 빠지게 빠져들던 프로 레슬링 풍경이다. 신나는 사각의 링은 또 있었다. 권투다. 당시 어찌나 인기가 높았던지 ‘참피온 스카웃’ 같은 TV 정규 프로그램까지 있었으니까. 유제두가 와지마 고이치를 혼쭐내고, 염동균이 로열 고바야시를 두들기고 세계 챔피언 벨트를 매던 삼삼한 순간들, 피식 웃으며 짠하게 추억한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Sun Kil Moon’의 1집 음반 ‘Ghosts Of The Great Highway’(2003)를 처음 들었을 때 얼얼했다.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인디 록 밴드 이름이 선킬문? 맞다. 1980년대 챔프 ‘돌주먹’ 문성길이다. 그런 그를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 밴드를 이끄는 미국 새드코어(Sadcore)의 기수, 마크 코즐렉이 자신의 또 다른 팀 이름으로 받들어가며 오마주할 줄이야.

2 강렬한 재킷 커버가 아름다운 마일스 데이비스의 1958년 명반 ‘Milestones’. 말 그대로 모드 주법의 ‘이정표’다. 3 선킬문(문성길)의 1집 음반 ‘Ghosts of the Great Highway’ 재킷 커버. ‘위대한 운명을 살았던 사람들’쯤으로 봄 직하다. 여기엔 ‘Si Paloma’라는 연주 트랙도 있는데 곡명의 발음에서 연상되는 험악함(?)과는 달리 그 맛은 풋사과처럼 아삭아삭 상큼하다.

느릿느릿 우수 어린 선율이며 닐 영의 아우라를 풍기는 목소리의 코즐렉 이 친구, 지독히도 우울하다. 여기서 백미는 14분짜리 ‘Duk Koo Kim’ 트랙이다. 복서 김득구다. 82년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가 레이 붐붐 맨시니를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며 챔프 꿈을 불사르던, 그리고 스러졌던 스물일곱 파이터의 불꽃 삶-. 그날의 김득구를 되살려 일으켜 세운 몽환적 진혼곡, 참 아프다.

땀과 피가 튀는 복서, 그 거친 숨소리를 머금은 마우스피스(치아 보호를 위해 입에 무는 고무)는 스르륵, 재즈 혼(horn) 악기 주자의 열띤 날숨처럼 마우스피스(입에 대고 부는 구멍)의 이미지로 겹쳐진다. 나의 오랜 영웅,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1926~91)다. 노련한 복서가 상대의 복부를 연타로 파고들듯 마일스의 트럼펫 블로윙은 공기 속을 부유하는 소리의 맥을 적시에 능숙하게 짚어 나간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에 귀 기울인다는 건 어느덧 식어버린 가슴에 뜨거운 불도장을 새기는 일이다. 그는 육십 평생, 실험과 창조라는 화두를 붙잡고 용맹정진했다. 클리셰(상투적인 스타일)를 유독 싫어해서다. 40년대 찰리 파커(알토 색소폰)의 사이드맨으로 비밥 동네에 짜잔~하고 나타난 마일스. 그 후 아주 오래도록 성큼성큼 몇 걸음씩 시대를 앞서갔다. 쿨 재즈, 하드 밥, 모달 재즈, 재즈 록 등등 뭘 연주하든 그는 늘 절정의 고수였다. 별별 장식음이나 비브라토 없이도.

한데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취주 내공만 놓고 보면 마일스는 아쉽게도 또 다른 트럼펫 귀신들 -모두 요절한- 패츠 나바로나 클리퍼드 브라운, 리 모건의 솜씨엔 미치지 못했다. 그들처럼 바람을 가르듯 재빠르게, 또렷한 고음역으로 매끄럽게 부는 건 딱히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마일스가 뽐낸 강렬한 혁신성의 정제된 힘은 살짝 달리는 연주 테크닉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마일스가 남긴 다종다기한 명반 중 어떠니 저떠니 해도 50~60년대 중반에 쏟아낸 모던 재즈 계열의 명연들이 나에겐 조금 더 예뻐보인다. 모드(mode) 주법으로 수놓은 그 유명한 앨범 ‘Kind Of Blue’보다 한 해 앞서 58년에 녹음된 음반 ‘Milestones’에 굉장히 끌리는 편이다. 여기엔 유니크한 색감의 재킷 커버 덕도 크리라(꼭 그렇다고 그의 로제타 스톤이라면 단연 이것이라고 잘라 말할 생각은 없다. 가령 Cookin’이나 Relaxin’ 같은 일명 ‘~ing’ 마라톤 세션 4부작은 물론이거니와 웨인 쇼터(테너 색소폰), 허비 행콕(피아노) 등과 함께한 65년 시카고 플러그드 니클 클럽에서의 일곱 장짜리 라이브 명연이 워낙 눈부시기에).

사실 모드 실험이라면 존 콜트레인(테너)에 캐넌볼 애덜리(알토)를 더한 3관 편성의 섹스텟 연주인 이 음반 ‘Milestones’가 먼저다. 빈번하게 화성을 바꾸는 악상 대신 독창적인 두 개의 모드로만 자유롭게 풀어헤친 타이틀 트랙이 특히 좋다. 후후훅~ 징그러우리만큼 싱그러운 숨결이다. 업템포로 긴장과 이완 사이를 오가며 착착 감기는 맛 역시 참 스마트하고. 대개는 뭔가 새로운 것의 경우 약간의 어색함이랄까 이질감이 느껴지게 마련인데도 말이다. 뜨거운 하드 밥 절정기에 마일스는 하드 밥의 한계를 꿰뚫어 본 듯하다. 말하자면 수십 년이 지나도록 “좋은 게 좋은 거죠” 식으로 타성에 젖는 웬만한 재즈 뮤지션과는 그 레벨이 사뭇 달랐다고나 할까.

복서 출신의 밥 피아니스트 레드 갈런드도 근사하다. 맙소사,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듯 쾌활한 그 손놀림이라니. 후임 멤버인 빌 에번스의 타건에 견줘도 스타일리시한 상상력이랄까, 그다지 밀리지 않는다. 적어도 이 앨범에선.

듀크 엘링턴이 그랬던가. “마일스 데이비스는 재즈계의 피카소”라고. 하긴 여성 편력의 화려함까지 엄청 닮았다. 해서 오늘 밤엔 귀로 맛보는 황홀한 극치감 ‘이어가슴(Eargasm)’, 푹 젖어볼까 싶다. 언제나 창백한 듯 검푸르게 빛나며 내 폐부를 쿡쿡 깊숙이 찌르는 뮤트(mute) 사운드 ‘It Never Entered My Mind’를 곁들여서. 매혹의 뒤엔 늘 권태가 온다지만 ‘황금 입술의 사나이’ 마일스는 영락없이 마일스다.

박진열 기자



정규 음반을 왜 앨범이라고 할까. LP판을 왜 레코드라고 할까. 추억의 ‘사진첩’이고,‘기록’이기에 그런 거라 생각하는 중앙일보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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