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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 나에게도 모성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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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이 재조명되고 있다. 그동안 감춰왔던 비경(秘境)이 한 겹 한 겹 속살을 드러내면서부터다. 그 중심엔 ‘길’이 있다. 무등산 옛길엔 모두 24만5000여 명이 다녀갔다. 어머니의 품처럼 광주를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는 무등산. 그 변신이 궁금해진다. [프리랜서 오종찬]

그 이후 무등은 나에게도 모성이다.

그 이후 무등 기슭에 가 있으면 내 언어는 근대의 언어가 아니라 아들의 언어가 된다.

1954년 초겨울 장성 갈재는 삼엄했다. 휴전이 어렵사리 선포된 지 몇 달째이건만 아직 전쟁의 극한 상황은 지워질 줄 몰랐다.

그러므로 갈재는 지리산 회문산과 연결되고 그것은 영광 끝자락까지 안온한 지역으로 두지 않았다. 아니 저 백운산 조계산과 화순 백아산도 그냥 산이 아니었다.

호남선 하행선의 완행열차가 정읍을 지나면 벌써 한층 더 긴장한다. 기관차의 앞에 기관총을 고정시키고 열차 뒤에도 어김없이 기관총이 노려보고 있었다.

무등산 서석대 표지석

그런 열차의 삼등실을 타고 가슴 조이며 가고 있었다. 석탄연기로 꽉 찬 터널을 지나자 남도의 풍광이 거기 있었다. 임곡 하남 어름에서 동남쪽 하늘 속에서 방금 내려앉은 듯한 묵중한 무등의 모습을 처음으로 만난 감흥은 아직껏 선열(鮮烈)하다.

송정리에서 얻어 탄 털털이 버스가 상무대 앞을 지나는 동안 그 군사거점이 몇 10년 뒤의 학살의 기지가 될지 그 누군들 알았겠는가.

나는 광주 덕림사와 동광사에 머물렀다. 증심사에 머물렀다. 얼마 뒤 무등의 바람재를 넘어 원효사에 이르렀다. 그 산중에서 나는 1일1식으로 지냈다.

첫눈이 내렸다. 입석대 서석대의 성스러운 설경을 건너다 보며 나는 내 몸의 피를 보태고 싶어 손가락 하나를 저며 그 청정한 흰 눈 위에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그 겨울 뒤 무등이 내려다 보는 남도의 동서남북을 떠돌았다. 떠도는 동안 무등은 자주 원경으로 근경으로 나에게 모성의 눈길을 주었다.

조선 태조는 바보였다. 이런 산을 무정의 산이라, 무정산이라 이름 지었으니 말이다.

나에게 무등 체험은 50년대로 끝나지 못한다. 70년대 내내 아니 저 80년대 내내 무등은 나의 시였고 나의 정치였다. 세상에 대고 나는 소리쳤다. ‘광주는 이제 사상이다’라고.

무등은 심상(心象)의 모성으로부터 사상의 모성이고 역사의 모성으로 펼쳐나갔다. 그럼에도 무등은 본래의 면목을 늘 베풀었다. 술 취해서 바라보라. 술 깨고 나서 우러러보라. 그 원융의 육신으로, 그 덕망으로 그 처절한 혼을 내장하고 있는 불굴의 기상으로 실재하는 무등.

무엇 하나 뽐내지 않고 오로지 둥글둥글한 평상심의 무등. 하지만 단 한번도 비굴하게 고개 숙여본 적 없는 영구 지존의 무등.

고 은 <시인>

이 무등 있어 무등 아래의 삶 고단하건만 드높다.

이 무등 있어 무등 평등의 날이 기필코 오고 있다.

이 무진 무궁의 무등 있어 무등 오르는 길이 있다.

이 만고의 무등 있어 그리도 길고 긴 한을 품되 반드시 올 무등의 영광, 그 영광의 거처 아닐 수 없다.

그 이후 나에게도 모성이며 삶의 징표인 ‘아 무등이여!’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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