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중앙시평

약점만 드러낸 북한의 권력승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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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중국 관료들은 오바마 정부와 워싱턴 내 영향력 있는 아시아계 인사들에게 북한의 권력 승계 작업을 더욱 진지하게 바라볼 것을 촉구해 왔다. 김정은의 발탁은 ‘김일성 왕조’가 오래 지속될 것이며, 북한이 이제 중국의 선례를 따라 현대화와 경제 개혁·개방에 나설 만큼 자신만만한 상태임을 시사한다는 게 중국 측 주장이다. 또한 북한을 그 방향으로 몰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중국이 제시한 3단계 공식에 따라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북·미 양자 대화→6자회담 수석대표 회의→ 6자회담 전체회의 순으로 진행해 나가자는 것이다.

중국 관료들이 중국 공산당과 북한 노동당의 긴밀한 연대와 양국 간 경제 교류 증가로 평양을 잘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워싱턴은 베이징 측 주장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중국의 속내가 너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이나 한국이 북한 내 급변사태에 대비해 비상 체제를 갖추려는 움직임에 반대한다. 그럴 경우 차라리 다른 나라들이 북한 지원에 나서길 바란다. 남북한이 민주주의 체제로 통일돼 중국과 국경을 맞닿게 되면 전략적으로 득이 될 게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후계자 옹립 작업을 긍정적으로 보기 힘든 또 다른 이유는 당대표자회 이후 평양이 모든 이슈에 대해 훨씬 강경한 노선을 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3대 세습의 정당성 부족을 무마하려는 듯 북한 정권은 핵 보유국 지위를 과시하는 선전을 강화하고 있다. 박길연 유엔 주재 북한 대사는 최근 유엔 총회 연설에서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경제 개혁도 후퇴했다. 북한 내 외환거래를 통제할 목적으로 2002년 이후 추진해 온 개혁 작업의 주요 부분을 원점으로 되돌려버렸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북한의 경제 정책은 갈수록 1950년대와 60년대의 중앙집권화된 방식으로 회귀하고 있다. 아마 권력 승계 작업을 둘러싼 불안 요소가 이 같은 강경 노선의 한 이유일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이번 후계자 선정은 사실상 북한 체제의 강점보다는 약점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후계자 선정 공식 발표가 거듭 지연된 것 자체가 김정일의 건강과 김정은 옹립에 대한 컨센서스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김일성이 김정일을 발탁할 때도 만만치 않은 내부 반발이 있었다. 장성택이 숙청된 뒤 수년간 구금 상태에 있었고, 알코올 중독설이 나돈 점으로 미루어 그가 제대로 후견자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필자가 99년 외교협회 동료와 함께 장성택 측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북한에 갈 뻔했으나 막판에 취소된 것 역시 장성택이 처했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던 듯하다). 김경희는 혈통상의 이점으로 숙청의 위험에선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지금껏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입증된 바 없다. 이 점은 김정은 역시 마찬가지다. 즉 북한의 권력 승계 작업은 미 정부 안팎에 관계 개선을 기대하게 만들기보다는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한 대비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강화시켰다.

물론 김정일 사후에 김정은이 좀 더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지 말란 법은 없다. 몇몇 낙관적인 인사는 김정은의 해외 체류 경험과 독일어 등 외국어 구사능력을 들어 ‘북한판 고르바초프’가 될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그럴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따라서 워싱턴이 북한과 대화 채널을 재개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북한이 진지하게 핵 협상에 나설 것이란 기대는 매우 낮기 때문에 오바마 정부가 대화를 서두르진 않을 가능성이 크다. 최소한 남북한 관계가 호전돼 한국이 북·미 양자 대화를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시점은 돼야 한다. 그러나 이번 후계자 선정을 전후해 북한이 남한에 보여준 태도를 고려할 때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마이클 그린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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