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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심연의 도도한 울림-김애란의‘생성의 존재론’ (손경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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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단순히 표면적인 세계의 질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연에 숨겨져 있는 보다 낯설고 광대하고 풍요로운 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이라고 할 때, 김애란 소설은 이러한 ‘깊이’의 미덕을 지니고 있다. 그 깊이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화려한 도시가 외면한 공간들, 번화가 뒤켠의 낡고 후미진 골목들, 어두침침한 반지하 자취방, 신림동 고시원, 노량진 독서실, 조립식주택 옥상의 컨테이너박스 같은 주변부의 어둡고 깊숙한 공간들로서 형상화된다. 이 공간들은 21세기적으로 디자인된 도시의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삶의 서사적 밀도를 드러내는 유물론적인 지표들이다. 정이현이 서울 중심부의 공간들과 주류의 삶에 주목하여 이 시대의 징후를 드러낸다면, 김애란은 더 이상 미디어로부터도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부의 미묘한 틈새들을 섬세한 손가락으로 터치함으로써 삶 속에 잠재된 깊이를 문학적으로 구현한다.

서울은 24시간 환한 불빛을 밝히며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편의점처럼 “거대한 관대”(「나는 편의점에 간다」, 33쪽)의 도시이다. 소비사회의 랜드마크인 편의점에 드나들며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모든 사람은 계급, 나이, 성별, 출신, 생활환경에 관계없이 ‘소비자’이자 ‘서울시민’이라는 균질적인 정체성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거대한 관대’의 도시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위계와 모순을 은폐한다. 소비사회의 동일성, 자본의 획일성이 주는 아름다운 조화와 평화의 이면에는 곪아터져 진물이 흐르는 우리 사회의 환부가 은폐되어 있다. 그것은 그저 “원래 그렇다”(「도도한 생활」, 35쪽)는 ‘자연성’의 언표로 간단히 번역되고 말끔히 감춰진다. 자유와 열정과 낭만의 강렬한 빛을 뿜어내던 대학 캠퍼스는 등록금 마련을 위해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고단한 취업준비생들이 머물다 가는 황량하고 삭막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김애란의 20대 주인공들은 대체로 고향집을 떠나서 도시에서 자립적으로 생활을 일구어나가는 ‘노동하는 존재들’이다. 「도도한 생활」에서 ‘나’가 “매일 어깨에 의자를 이고 등교하는 아이처럼 평생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 순 없다”(33쪽)고 푸념하듯이 노동은 삶의 중력을 느끼게 해주는 고통스러운 짐이다. 그러나 노동은 인간이 스스로의 생존과 자립을 위하여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실천하는 행위로서 건강한 정신의 발산이기도 하다. 김애란에게 노동은 다음과 같이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보다 원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봄볕에 달구어진 이 섬 어딘가, 듬성듬성 돋은 초록 너머에는 일상적이고도 유구한 노동, 알 수 없는 소문과 권태, 혹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봐도 좋을 만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아이를 낳고 또 아이를 낳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플라이데이터리코더」, 249쪽)

그러나 인류의 ‘일상적이고 유구한 노동’은 구약성서에 의하면 인간이 신의 명령을 거역하여 선악과를 먹은 원죄에 대해 선고된 숙명적인 형벌이다.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고대 세계에서는 노동은 곧 노예가 하는 일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열등하고 모욕적인 일로 간주되었다. 경제학사에서 데이비드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이 등장하고 서구 산업 사회에서 노동의 중요성이 부각되던 근대 이전까지 노동은 진지한 담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김애란은 이러한 노동에 문학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사와 노동의 긴밀한 연관을 환기시킨다. 김애란의 노동하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삶의 무게를 “아르바이트를 하고 어마어마한 피로감을 느낀다 해도, 저 너머 도미노의 끝을 상상할 수 없고, 원망할 수 없는”(「도도한 생활」, 25쪽) ‘투명한 불행’으로 인식한다. 후기 자본주의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메커니즘 하에서는 마르크스의 시대와 달리 착취의 주체도, 부조리의 실체도 모호해졌기 때문에 개인들은 왜 한없이 노동해도 삶은 제자리걸음인지 알지 못한 채 현재라는 시간의 벌판을 휘적휘적 걸어갈 뿐이다. 그러나 김애란은 무기력하고 남루해 보이는 이러한 주변부의 삶에 ‘도도함’이라는 형용사를 부여한다. 「도도한 생활」에서 ‘나’의 피아노는 아빠의 빚으로 인해 차압 딱지가 붙기 전에 고가품을 처분해야 했기 때문에 시골의 고향집에서 서울의 비좁은 반지하 자취방으로 옮겨진다. ‘나’는 “몰락한 러시아 귀족처럼 끝까지 체면을 차리며 우아하고 담담하게 서 있”(23쪽)는 이삿짐 트럭 위의 피아노가 그저 민망하기만 하다. 그 해 여름 “매캐하고 비릿한 도시 냄새”(37쪽)와 함께 검은 빗물이 자취방 안으로 스며든다. 도시의 오물은 그렇게 반지하 셋방이라는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흘러내린다. 바가지로 정신없이 물을 퍼내던 ‘나’는 체념한 듯이 문득 하던 일을 멈추고 어린 시절 아빠가 불러주던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한다. 그것은 도시의 빗물이 출렁이는 반지하로부터 세상에 울려 퍼지는 존재의 소리이다. 피아노의 ‘도──’ 음은 내면의 비밀스러운 노스탤지어를 간직하고 있는 듯한 긴 여운을 남긴다. 그 고요하고 우아하고 평온한 저음은 존재의 양도할 수 없는 도도한 존엄성에 대한 청각적 표현이다.

“세상 사람들은 가끔 아무도 모르게 도── 도── 하고 우는 것은 아닐까 [……] 사람들 저마다 자기도 모르게 까닭 없이 낼 수 있는 음 하나 정도는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19쪽)

음악과 마찬가지로 삶은 코드적인 것이 아니라 다성적인 것이며, 음계의 변화처럼 삶은 언제나 생성이고 운동이며 리듬이다. 그리고 생의 처연함을 초극하는 그 도도한 자기긍정의 삶은 곰팡이 피는 눅눅한 반지하, 그 도시의 심연에서 더욱 풍요로운 부피와 질감을 지닌 채 청아한 감각의 선율로 울려 퍼진다.

2. 자본의 감미(甘味), 가부장제 해체와 모성의 힘

김애란 소설에서 묘사되는 2000년대의 서울은 욕망의 도시이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나는 편의점에 간다」, 32쪽). 자본주의적 욕망이란 물질적 재화에 대한 필요와 소비욕구의 총체이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 하의 국가주도적인 산업사회가 남성중심적 속성을 지녔다면, 오늘날의 민주주의 하의 소비사회는 보다 소프트하고 감성적이고 여성적인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본질적으로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변화에 있다기보다 ‘정치적 지배’에서 ‘자본의 지배’로의 전환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자본의 지배는 달콤함을 선사함으로써 과거의 정치적 지배보다 한층 더 정교해진 억압을 은폐한다. 자본의 감미(甘味)는 이성의 비판적 기능을 와해시키고 정신을 말랑말랑하게 녹여서 감성과 욕망의 아나키즘을 고무한다. 오늘날의 감성적 욕망의 도시는 이러한 자본 지배의 효과이다. 그러한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갈수록 왜소해지는 난쟁이들의 욕망이다. 김애란의 「큐티클」(『2008 이효석문학상 작품집』, 해토, 2008)은 ‘손톱’이라는 조그마한 신체부위를 관리하기 위해 마련된 어마어마하게 세분화된 화려한 코스들을 통해 “도시의 감미와 대처의 추파”(60쪽)에 대해 말하고 있다. 큐티클은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이 소설은 작은 세계에 작은 인형처럼 바싹 오그라든 채 갇혀 있는 도시인들의 좁은 시야의 병리학적 징후를 드러내고, 자본의 메커니즘이 생산한 이 시대의 소인(小人)적 취향들과 즉물적 욕망을 풍자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부장제가 해체되는 현상은 과거의 남성중심적인 권위주의 체제가 이처럼 소인주의를 촉진하는 포스트모던한 자본권력으로 전환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났다. 더욱이 90년대 말 외환위기의 여파로 기업의 도산과 대량의 정리해고가 일어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감있는 가부장’이라는 아버지들의 전통적인 정체성은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했고, ‘고개숙인 아버지’라는 신조어가 미디어를 통해 유행처럼 전파되었다. 김애란 소설 특유의 실추된 부권으로서의 아버지의 이미지는 작가의 개성적 창조물이면서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분리될 수 없다. “그즈음 세계는 매우 흔들리고 있었다. 먼 곳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의 소식 혹은 예감이 전해왔고, 한국에서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공원에 앉아 있는 아버지들의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자주 보도됐다. 자세히는 알 수 없어도 사람들은 그 시간 아버지들이 단지 벤치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불안해하는 듯했다”(「사랑의 인사」, 154-155쪽).

김애란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여러모로 ‘좀 난감한 사람’이다. 그는 술과 노름을 좋아하고, 빚을 져서 아내를 고생시키고, 자식에게 신세를 진다. 그는 때론 비장하고 결단력있는 부성의 이미지를 연출하려 애쓰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어색하고 우스꽝스럽다. 김애란의 인물들은 가족에게 상처를 입힌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유년시절 함께 했던 아버지와의 추억과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라는 운명적인 연대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는 못한 양면성을 갖고 있다. 「달려라, 아비」에서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임신을 하자 ‘나’를 낳기도 전에 도망가버린다. ‘나’는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나’의 상상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야광바지를 입고 밤이나 낮이나 웃으면서 전세계를 달린다. 책임지기 싫어서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생각하면 아버지라는 존재를, 자신의 생명의 그 비참한 근원을 견딜 수 없기에 ‘달리는 아버지’라는 가상의 이미지를 상상해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형이상학적으로 위안하는 것이다.

“갑자기, ‘나는 결국 용서할 수 없어 상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버지를 계속 뛰게 만드는 이유는, 아버지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죽여버리게 될까봐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러자 갑자기 나는 서러워졌고, 그 서러움이 나를 속이기 전에 빨리 잠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27쪽)

소설 말미에서 ‘나’는 눈부신 땡볕 아래서 달리고 있는 아버지에게 썬글라스를 씌워드린다. ‘나’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초라하고 시시한 존재가 아니라 썬글라스를 끼고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영원히 웃으며 달릴 역동적인 존재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가난한 아버지들에 대한 응원인 동시에, 삶에 대한 끝없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찬가이다.

김애란의 인물들은 결국 이 무책임한 아버지에게도 고유한 삶과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재성의 영토가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 김애란이 그리고 있는 아버지의 초상은 더 이상 권위적인 가부장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유한하고 나약한 남자이며, 세상의 풍파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작은 풀잎 같은 불안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이 무능한 아버지는 종종 특유의 유머 감각과 낙천성을 보여준다. 그는 어린 아들에게 느닷없이 “고추를 보여주면 스카이 콩콩을 사주겠다”고 근엄하게 말하며 움찔움찔 망설이는 아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는 엉뚱한 사람이고(「스카이 콩콩」), 만두배달하다 말고 배달 간 곳의 노름판에 끼어 있거나 구멍가게 앞에서 인형 뽑기를 하는 사람이며, 집을 망하게 하고도 설악산에 단풍놀이를 가는 사람이다. 또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 위를 질주하다가 앞바퀴를 들며 “얘들아 너흰 절대 보증 서지 마!”라고 오열하고, 그 덕에 머리를 조아리며 속도위반 딱지를 떼는 사람이다. 그러나 때론 어린 딸들을 불러 앉혀 다정하게 노래를 불러주며 알 수 없는 쓸쓸한 표정을 짓는 사내이기도 하다(「도도한 생활」). 이렇게 김애란 소설에서 가부장제는 해학적이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해체된다.

이러한 가부장제 해체와 동시에 실질적인 가장이 되는 ‘강인한 어머니’와 ‘독립심 강한 자식들’이라는 김애란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달려라, 아비」에서 어머니는 여름날 반지하방에서 아버지 없이 혼자서 ‘나’를 낳는다. 어머니는 가위를 들고 자신과 자식을 연결하던 물리적 끈을 스스로 자르고 ‘나’를 세상 밖으로 내보낸다. 이 고독한 모성의 힘은 가부장적인 권력과는 다르다. ‘초자아’로서의 가부장이 행사하는 규율적 강제와는 달리 모성의 강인함은 근원적으로 생리학적인 지배에서 비롯된다. 이는 ‘새끼’에게 하루 세 끼 밥을 해 먹이며 신체기관들을 성장시키는 ‘어미’의 원초적 본성과 연관된다. 「칼자국」에서는 ‘칼’이라는 위엄 있고 단단하면서도 우아하고 신랄하게 번뜩이는 빛을 품은 금속성의 물질이 모성의 힘에 대한 은유로서 나타난다. 그 차갑게 빛나는 칼날은 식당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온전히 담당해온 어머니의 강인함에 대한 메타포이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의 일원론적 복합체이다. 김애란은 플라톤 이래의 영육 이원론적인 사고에 대항하여, 어머니라는 존재를 관념적인 모성과 결합시키지 않고 ‘새끼’의 “컴컴한 아가리 속으로”(155쪽) 음식을 넣어주는 ‘어미’라는 동물적 이미지로 표현한다. 그 유물론적 원초성은 새끼의 입 속의 어두운 우주를 자극하고 팽창시키는 우주론적인 신비한 에네르기로 고양된다.

3. 생의 시원으로서의 순수기억, ‘오래전 사라진 말(言)들’

이처럼 김애란 소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끊임없이 호명하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가족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어머니를 문학적으로 소환함으로써 김애란이 시도하는 것은 생의 근원에 대한 탐구이다. 이것은 ‘공기, 바람, 햇빛’과 같은 우주론적 원질(原質)이 인간의 발생론적 시원이라는 형이상학적 사유로 변주된다(「플라이데이터리코더」). 여기서 김애란은 생명의 근원적 아르케(Arch?)를 찾으려 했던 고대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인들과 수천 년의 시간적 간극을 초월하여 공명한다. 이러한 생명의 시원에 대한 탐구는 궁극적으로 존재의 동(同)근원성에 대한 인식을 함축한다. 즉 각각의 존재자들은 인종, 신분, 계급으로 서로 분열되고 구별지어지기 이전에 동근원적인 존재였다는 우주의 통합적 본질과 세계의 총체성에 대한 인식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김애란 소설에서 이러한 존재의 시원성은 깊은 바닷속 어둠, 심해저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들이 인류의 조상이라는 아낙시만드로스적인 상상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사랑의 인사」), ‘내가 태어난 방’, ‘작고 어두운 빈방’, ‘네모난 부재’라는 고요한 공허의 이미지, 존재론적 무(無)의 관념으로 표상되기도 한다(「네모난 자리들」). 그러나 그 ‘사각의 텅 빔’은 동시에 생성의 잠재적 권능으로서 ‘온 세상을 빵빵하게 채우는 공허’이자, ‘충만한 무’로 나타난다. 또한 존재의 시원성은 ‘아버지의 거대한 성기에서 밤하늘로 민들레씨처럼 퍼져나가는 아름다운 불꽃들’이라는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로 표상되기도 한다(「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고독한 우주를 향해 멀리멀리 방사(放赦)되는 아버지의 반짝이는 씨앗들’은 원초적인 충력이자 모든 존재의 발생 근거이다. 따라서 나의 형제들은 “코펜하겐에도 있고, 스칸디나비아반도에도 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도 있고, 스톡홀롬에도 있고, 평양에도 있고, 이스탄불에도 있다”(178쪽)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스케일의 상상력이 펼쳐진다.

“천문학자들의 이론은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시(詩)”(「스카이 콩콩」, 72쪽)라는 김애란의 관점은 과학과 문학적 상상력의 결합, 우주론과 존재론의 결합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존재의 시원에는 아득히 먼 거리에서 투명한 은빛 궤도로 감싸인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그 이야기는 전설의 섬 아틀란티스와 같이 ‘오래전 사라진 말(言)들’이며, ‘사라진 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며(「사랑의 인사」), 블랙박스 속에 감춰진 진실 같은 것이다(「플라이데이터리코더」). 태초의 서사의 진실은 표면이 아닌 어두운 심연에, 심해저에, 블랙박스 안에, 사각의 부재 안에 현실태가 아니라 잠재태로서 존재한다.

바람, 공기, 바다 밑의 어둠과 같은 우주론적 이미지들을 통해 존재의 근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적인 스타일이다. 그러나 하루키가 뜻하는 존재의 근원은 존재 전체가 귀속되는 상실과 허무로서의 시(詩)적 근원을 의미하는 데 반해, 김애란이 뜻하는 존재의 근원이란 존재의 발생 근거, 생명의 원초적 시원이라는 발생론적 함의를 갖는다[“아버지, 나는 어떻게 태어났나요?”(「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여기에는 상실과 허무의 정서가 아니라 생성을 향한 긍정의 에너지가 감돌고 있다. 하루키가 말하는 존재의 근원이란 그가 ‘위대한 불완전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서 개체성의 원리를 파괴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즉 개별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견고한 윤곽을 해체함으로써 비로소 존재의 소리인 ‘바람의 노래’를 들을 수 있고, ‘위대한 불완전성’과 원초적 허무 속의 공존이라는 존재의 시적 근원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애란이 말하는 존재의 근원은 그러한 정태적인 허무의 지평이 아니라 동태적인 생성의 근거이다. 그러한 생성의 근원은 개체성을 배제하지도 파괴하지도 않으며, 개별 존재자의 고유성과 특이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의 발생론적 시원의 탐구는 궁극적으로 개별 존재자들의 고유한 삶과 그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채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한 시적 항해이다. 김애란은 하이데거적으로 존재의 근원으로 회귀하기보다, 베르그송적인 생기론적이고 발생론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김애란은 생성의 근원을 탐험함으로써 개체들의 독특한 생에 관한 눈부신 이야기들을 펼쳐내고자 한다. 따라서 존재의 심연은 개별자의 심층 의식, 존재론적 지평으로서의 기억의 문제로 전환된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존재 내부의 가장 밑바닥의 심층을 ‘순수기억(le souvenir pur)’이라고 명명했다. 이 순수기억의 존재론적 지평은 아무도 알 수 없고 자기자신도 현실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과거의 풍요로운 이야기들(‘오래전 사라진 말들’)이 잠재적으로 내재하는 광활하고 신비로운 심연이다. 우리의 과거는 현실의 표면에서는 사라졌지만, 그 기억들과 풍경들은 오래도록 우리의 몸 속에 남아 내재성(l’immanence)의 무한히 확장된 우주론적 지평 속에서 순수 잠재태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과거는 부재하면서도 존재한다. 부재는 동시에 ‘빵빵한 공허’이다. 이러한 순수기억의 지평으로부터 현실 쪽으로 그 방향을 점차 이동할 때 ‘이미지-기억(image-souvenir)’과 ‘습관-기억(habitude-souvenir)’이라는 두 종의 기억을 만나게 된다. ‘습관-기억’이 반복되는 일상을 양식 있게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메커니즘들에 국한되는 ‘비개별적인 기억’이라면, ‘이미지-기억’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이며, 우발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의 무수한 단편적인 표상들이다. 이것은 일상적인 삶의 주의가 이완되었을 때, 즉 삶의 사건에 봉착하여 몸의 감각-운동적 평형이 교란되었을 때 증대한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에서 김애란은 이러한 ‘이미지-기억들의 우발적이고 무차별적인 습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랜 시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잠자리에 누워 뒤척이는 ‘그녀’의 몽롱한 의식의 수면 위로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발적으로 특정한 기억의 조각들과 장면들이 떠오른다. 우연히 ‘털’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순간 잊고 있었던 자신의 종아리 한가운데 박혀있던 체모 한 올에 관한 수치스러웠던 기억으로 의식은 순식간에 내달린다. ‘종아리’라는 표상에서 예전 남자친구가 자신을 ‘닭다리’라고 놀렸던 기억으로 갑작스럽게 옮아가고, 그러다 ‘닭고기’가 생각나고, 자신이 어릴 때 ‘닭의 목 부위’를 제일 좋아했다는 기억으로 옮아가고, 어린 시절 어디서 구해왔는지 닭 모가지만 열 개가 넘게 담긴 상자를 자신에게 내밀었던 ‘아버지’를 불현듯 떠올린다. 그러다 잠이 든 ‘그녀’는 어린 딸을 기쁘게 해주려고 커다란 삽에 태우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젊고 건강했던 아버지에 관한 꿈을 꾸며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4. 고독과 창조적 생성

삶이란 이러한 의식이 점유하고 있는 시간적 지속의 지평에서 펼쳐지는 우발적-생성적 흐름들이다. 삶의 진실이란 이렇게 내재적으로 산출된 실존의 섬세한 모습들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내재적이며 생성적인 개별 존재자들의 독특한 삶은 본질적으로 쉽게 공유되거나 소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과의 공존과 소통은 일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표면적 사태에 불과할 뿐, 내밀하게 뻗어나가는 실존의 무수한 선들은 근원적으로 합치되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있더라도 각자의 마음속에 언제나 혼자만의 방을 준비해두고 있다. 이 방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피투성(被投性)으로서의 존재가 숙명적으로 점유하는 고독의 공간이다. 「침이 고인다」는 이러한 존재론적인 고독에 관해 말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는 행위는 시각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눈망울에 가득 고였다가 깜박이는 순간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만큼 존재의 슬픔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존재의 슬픔은 단맛이 나는 껌을 씹으면서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는 현상으로서 내밀하게 감각화된다. ‘달콤함’과 ‘슬픔’이 뒤섞인 역설적인 혼종(混種). 이처럼 ‘침이 고인다’는 표현은 삶의 비가시적인 차원을 함축하고 있다. 형언할 수 없는 자기만의 뼈아픈 상처와 고독을 타인과 너무 쉽게 공유하려고 했던 것, 이것이 이 소설에 감도는 둘 사이의 위태로운 관계맺음의 시작이었다.

이처럼 김애란 소설을 지속적으로 감도는 테제는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이다. 그것은 개별 존재자들의 상이하고 이질적인 내재성의 세계이다. 존재가 그러한 고독을 지닌다는 것은 동일자의 세계로부터 배제당하거나 수동적으로 고립된다는 뜻이 아니다. 고독한 존재자들은 동일성으로부터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내재적인 생성의 의지를 광대한 우주의 어둠을 향해 발산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능동적이며 생산적인 타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고독을 창조적 본성을 지닌 자의 숙명으로 보았다. 자신의 고유한 삶을 부정하는 약자들은 고독을 오로지 데카당적인 뉘앙스로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고독의 풍요를 향유하지 못하고, 거기서 존재의 결핍감과 권태를 느낄 뿐이다. 반면에 삶을 긍정하는 강자들은 고독을 힘의 고양과 생성의 기쁨으로서 향유한다. 그것은 옥상 위의 가로등 아래서 홀로 스카이 콩콩을 타며 밤하늘을 향해 높이 도약하는 소년의 운동으로 표현된다.

“세계의 소란스러움을 등지고 가로등 아래서 홀로 스카이 콩콩을 타는 나의 모습은 고독하고, 또 우아했다. 스카이 콩콩을 타는 나의 운동 안에는 뭐랄까, 어떤 ‘정신’이 들어 있었다.”(「스카이 콩콩」, 65쪽)

김애란의 소설들에서 이처럼 ‘정신’이 깃든 물리적인 운동은 달리기나 스카이 콩콩을 타는 것과 같은 고독한 움직임으로 묘사된다. ‘바흐’의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침묵처럼 아름답던 음악”(79쪽)과 스카이 콩콩, 그리고 컨테이너박스에서의 단출한 삶을 언제나 조용히 비추는 가로등은 가난하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고 삶을 긍정하는 존재들이 지닌 고귀한 에스프리를 반영한다. 밝고 화려한 불빛 속의 도시가 주목하지 않는 밤의 서정적인 아름다움, 은은한 가로등 아래의 삶의 음악적 풍요, 도도하게 울려 퍼지는 한밤의 몽환적인 음악, 김애란은 바로 이러한 주변부의 공간, 도시의 심연의 수채화 같은 풍경들을 주목하고 거기서 고독의 의미를 미학적으로 재발견한다.

「종이 물고기」에서 ‘그’의 방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찾아올 수도 없는 방”(209쪽)이다. 이 네모난 작은 방은 비밀스러운 내재성의 영토에 대한 물리적 은유이다. 내재성의 영토는 창조적 상상력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자유의 기반이다. “그는 출산중인 소 우리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농부처럼 고요함을 필요로 했다”(209쪽). ‘그’는 방의 네 벽면과 포스트잇을 사용하여 ‘출산중인 소’처럼 창조의 과정 중에 있다. 첫 번째 벽면에는 책에서 발췌한 아포리즘을 적은 포스트잇들을 가득 붙인다. 두 번째 벽면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들을 적은 포스트잇들로 메운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였으므로 기교나 구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다만 정직하면 되었다”(210쪽). 이러한 자기정직성은 단순히 실증적인 사실들을 재현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내부의 깊은 곳에 있는 암실의 문을 열고 과거의 기억들로 들어가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고, 그 기억에 담긴 참된 의미들을 해석하고 자신의 실존적 의미들을 생성적으로 산출하는 것이다. 세 번째 벽면은 스치는 단상, 문장, 단어들로 채워지고, 네 번째 벽면은 공사장 인부들이 나누는 대화들, 버스나 시장, 공원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다양한 이야기, 수다, 음담패설 같이 직접 들은 타인의 생생한 언어들로 채워진다. 마지막으로 천장에는 드디어 자신의 소설이 될 구절들을 써 붙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포스트잇들이 가득 메워진 방은 “촘촘한 비늘에 덮인 어떤 생명체 같았다. 비늘이 붙어 있지 않은 창문과 방문은 그 생명의 어떤 기관처럼 느껴졌다. [……] 그는 그 방 전체가 하나의 종이 비늘이 달린 물고기가 되어 부드럽게 세상을 헤엄쳐다니는 상상을 했다”(216쪽).

여기서 김애란은 소설을 쓴다는 것, 창조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암시하고 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단순한 스토리텔링도 아니고, 실재의 재현도 아니다. 그것은 부단히 새로운 형태의 삶과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자기 안에 잠재해 있던,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자기 안의 외부’를 횡단하는 것이다. “그는 물러서서 벽면을 바라봤다. 자신의 몸에 그토록 많은 이야기가 깃들여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211쪽). “내재성은 모든 내적인 세계보다 더 깊은 안이기에, 모든 외적인 세계보다 더 아득한 밖이다”. 창조적 생성이란 감춰져있던 자기 안의 바깥, 그 미지의 대양(大洋)을 여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여행이다. 진정한 방랑자란 어쩌면 움직이지 않는 고독한 자가 아닐까? 김애란이 그리고 있는 사각의 고요한 방은 삶의 내부에 충만한 긍정적인 힘인 동시에 창조적 생성의 존재론적 지평이다. ‘그’의 창조적 영감들이 가득한 그 방은 생명력을 부여받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새로운 방으로 변모했다. 그 방은 또 하나의 새롭고 낯선 어떤 것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 생명의 꿈틀대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김애란의 삶에 대한 인식, 그 문학적 깊이는 ‘허무’라는 관념의 그물망에 결코 사로잡혀 있지 않다. 김애란은 자본주의적 욕망에 포섭된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허무에 결박되기보다 그 너머의 찬란한 삶의 지평을 모색한다. 비록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더라도 김애란의 인물들은 결코 해학적인 미소와 포즈를 잃지 않는다. 우울한 일상에서 웃음을 잃지 않으며 가난을 아름다운 고독의 모태로 삼는 것은 김애란 문학의 탁월한 미덕이다. 김애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살아 펄떡이고 꿈틀대는 연어처럼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 도도한 울림의 자존과 고독을 향유함으로써 개인적인 상처를 넘어 창조적인 생성의 삶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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