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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달려라 고향열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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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미 한국인의 애송시 반열에 오른 시에 나오는 ‘사평역(沙平驛)’이 실제로 존재하는 역이 아니라는 말은 오래전 들었다. 서울 반포동에 지하철 9호선 사평역(砂平驛)이 있긴 하지만 시와는 인연이 없을뿐더러 역 분위기도 생판 다르다. 어딘가 모델이 된 기차역이 있지 않았을까. 곽재구 시인에게 e-메일로 직접 물어보았다. 그는 인도의 대학도시 산티니케탄(벵골주)에 1년3개월째 머물고 있다. “사평역의 모델은 남광주역”이라 했다. 전남 광주 외곽의, 비둘기호 열차만 서던 아주 작은 역인데 그나마 지금은 없어졌단다. 곽 시인은 “시를 처음 쓴 것은 1976년 초겨울이었고, 당시 군 입대를 앞두고 문우(文友)들이 베풀어준 환송식에서 시를 낭송했다”며 “유신 시절의 어두운 현실을 담으면서도 절망 아닌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신춘문예 응모에 앞서 시를 좀 더 다듬고 나서 제목 때문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70년대의 한국 현실을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기차역이 없는 지명을 찾다가 ‘사평’을 만났다는 설명을 들으니 전후 사정이 제대로 이해되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역 하나쯤은 감추어 두고 산다. 사평역처럼 현실세계에 없는 역일 수도 있고, 신촌기차역처럼 번듯한 새 건물보다 한구석으로 밀려난 자그마한 옛날 역사에 담긴 청춘 저편의 기억이 훨씬 소중해지는 역일 수도 있다. 역 이름도 예전처럼 철도공사가 작명하면 그것으로 끝나던 시대가 아니다. 새로 역이 들어설 때마다 지역 주민과 지자체가 적극 나서서 발언권을 행사한다. 경북 김천과 구미는 오는 11월 개통되는 KTX(고속철도) 중간역 이름을 놓고 7년이나 승강이를 벌이다 최근에야 ‘김천(구미)역’으로 합의를 보았다. KTX 울산역은 ‘통도사’ 명칭이 포함되는 데 기독교계가 반발해 갈등을 빚다가 통도사를 공식 역명 아닌 부기(附記)역명으로 사용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12월 개통되는 경춘선 복선전철도 한동안 시끄러웠다. 사용료(3년간 3500만원가량)를 내고 이름을 다는 부기역명은 지난 주말에야 정리가 끝났다. 예를 들어 가평역의 부기역명을 놓고 가평군은 ‘자라섬’을, 춘천시는 자기네 행정구역에 속한 ‘남이섬’을 각각 선호했는데 결국 ‘자라섬·남이섬’을 함께 쓰기로 낙착됐다.

휴화산처럼 조용하던 ‘내 마음의 역’은 1년에 두어 번 깨어나 요란하게 기적을 울린다. 추석과 설 명절이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으로 시작하는 나훈아의 ‘고향역’이 왜 추석맞이 국민가요가 되었겠는가. 사실 ‘고향역’의 실제 모델은 작사·작곡자 임종수씨의 학창 시절 추억이 서려 있는 전북 익산역이다. 그러나 익산이면 어떻고 울산이면 어떤가. 고향 찾아 설레는 마음에는 전국 모든 역이 ‘고향역’인 것을.

그러고 보니 내일이 철도 개통 111주년을 맞는 ‘철도의 날’이다.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제물포 간 철도가 개통되고 벌써 이만큼 세월이 흘렀다. 친환경 교통수단으로 세계적으로 각광받기에 정부도 2020년까지 대부분의 철도에 KTX를 투입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철도 르네상스’다. 그러나 나는 초고속 대량 운송 추세에도 불구하고 철도가 한 가닥 ‘여유’를 꼭 발휘하길 간절히 바란다. 난(蘭)을 칠 때 잎 하나를 꺾어 놓는 파격(破格)의 여유다. 전국 곳곳의 옛날 역사, 말하자면 ‘사평역’들을 되도록 많이, 소중히 남겨 활용하자는 것이다. 철도가 추억과 ‘느림의 미학’까지 대변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