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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이미 다문화 사회, 통일 논의도 민족주의만으론 안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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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민족 동질성에 기반한 남북 통일 논의의 한계가 뚜렷해졌다.”(이수정 북한대학원대·인류학)

“통일보다 평화를 더 보편적 가치로 중시하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정영철 서강대·사회학)

“통일 관련 사회의식은 전환기에 있다. 기존의 통일담론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이우영 북한대학원대·사회학)

9~10일 고려대 백주년기념관에서 ‘한반도 통일론의 재구상’ 학술회의가 열렸다. 왼쪽부터 이상우(고려대·국문학) 교수, 송현주(한림대·언론학) 교수, 조성택(고려대·철학) 교수, 김종혁 중앙일보 문화스포츠 에디터, 김남석(부경대·국문학) 교수. [김경빈 기자]

기존 통일론을 향한 학자들의 쓴소리다. ‘민족 동질성 회복’ ‘단일 민족 국가’라는 옛 노래만으론 다원화된 사회 구성원을 설득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9~10일 이틀간 서울 고려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나온 지적이다. 토론회의 주제는 ‘한반도 통일론의 재구상’. 사회과학자와 인문학자가 한 자리에 모여 새로운 통일론을 모색한 흔치 않은 자리였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원장 김흥규)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소장 이수훈)가 공동 주최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했다.

주제 발표·토론에 참여한 대다수는 “기존 통일 담론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데 의견을 함께했다. 새로운 통일론이 절실하다는 문제 제기였다. 한국이 급속히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으며, 또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약해지고 평화와 통일을 각각 구분해서 보는 등의 인식 변화를 이제 핵심적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다문화주의로 통일론 재구성”=‘다문화주의와 통일담론’을 발표한 이수정 교수는 “탈냉전과 세계화, 다양한 이주민의 존재로 한국 국민을 더 이상 민족적 범주로만 묶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국 사회가 ‘단일 민족 국가’에서 벗어나 다인종·다민족 사회로 변화했다는 이야기다. 현재 국내 체류 외국인은 120만여 명. 전체 결혼의 12%가 국제결혼이다. 2020년이면 남한 어린이 다섯 중 한 명은 다문화가정 자녀가 되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이미 다문화 사회로 진입한 상황에서 남북 주민의 사회적 통합을 위해 더 이상 민족만을 강조해선 안 된다는 게 이 교수 주장의 요지다. 그는 남한에 정착한 북한 출신 주민의 경험을 예로 들고 “60여 년을 서로 다른 국가·가치·문화·체제에 살며 적대를 일삼았던 사람들의 통합이 단지 ‘민족의 이름으로’ 이뤄지기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국 청소년이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보다 북한 출신을 더 부정적으로 본다는 연구 결과도 제시했다.

이 교수는 “개인·집단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소통을 중시하는 다문화주의를 새로운 통일론의 기반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또 “차이를 무시하고 타자를 수용하지 않는 태도는 진정한 통합에 장애가 된다”며 “통일의 주체는 더 이상 선험적으로 주어진 기준에 근거한 동질적 주체가 아니며, 다중화된 주체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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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통일에 대한 의문·반대 높아”=‘통일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발표한 이우영 교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이제 일상적인 상식과 배치된다”고 말했다. 대다수 여론조사는 통일을 바라는 의견이 절대 다수로 나타나지만 실제 속마음은 다르다는 것이다. “통일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나눠보면 많은 사람들이 통일에 소극적임을 발견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포털의 토론방·댓글 등을 통해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엿봤다. 그 결과 통일이 꼭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이나 통일 자체를 반대하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고 했다. 북한의 이미지는 ‘불량 국가’ ‘가난한 나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통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 이 교수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즉 통일비용 부담에 대한 솔직한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일종의 ‘반북(反北) 의식’의 원인으론 ▶ 화해·협력정책에 대한 정치·사회적 피로감 ▶ 변하지 않는 북한의 태도 ▶ 남북의 경제·사회적 격차로 인한 차별의식 ▶ 새로운 세대가 갖고 있는 풍요에 대한 갈망 등을 들었다.

◆‘평화 vs 통일’ 이분법 확산=정영철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미래의 통일, 당면의 평화’라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당장의 통일’보다 남북간의 평화 공존과 현상 유지를 바라는 경향이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그 원인으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전쟁 가능성에 대한 안보 의식은 해체되고, 평화 공존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동서독 통일 이후를 보면서 통일의 부정적인 결과를 우려하는 점도 한몫 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젊은 세대의 통일 문제에 대한 회피, 유보적인 태도가 역설적으로 남북의 평화적인 공존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서 “이런 현상은 평화와 통일을 분리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천인성 기자



민간교류, 평화운동 흐름이 통일론 지평 넓힐 것
조대엽 교수 ‘시민사회 통일론’ 눈길

조대엽(고려대·사회학) 교수는 “뚜렷한 한계를 보이는 국가주의 통일 패러다임 대신 비정치적인 민간교류와 평화운동, 시민사회 주도의 통일 운동 같은 흐름이 통일론의 지평을 넓힐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시민사회통일론의 전망’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국가주의 통일론’의 대안으로 부각 중인 ‘시민사회 통일론’을 분석했다.

조 교수는 “분단 이후 우리의 통일론은 대개 국가주의 통일론으로 집약된다”고 했다. 단일민족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 통일 추진의 주체가 국가 권력이고 ▶ 추진 수단 역시 국가권력에 의해 통제되는 형태다. 그런 기조는 1990년대 이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민주화의 진전으로 시민사회의 자율적인 공간이 확장됐기 때문이다. 햇볕정책 이후엔 남북 교류·협력에 민간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 ‘시민사회 통일론’이란 새로운 흐름이 등장한 배경이다.

국가주의 통일론과 시민사회 통일론은 분단에 대한 인식, 달성 수단, 이념 및 가치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표>

국가주의 통일론은 ‘불완전한 민족 국가’인 남북한이 통일로 한반도에 단일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시민사회통일론은 분단이 시민들의 삶을 불안정하게 한다는 데 초점을 두며, 평화·인권·환경·여성 등의 관점을 중시한다.

‘민족 정체성’은 국가주의 통일론의 핵심이다. 시민사회 통일론은 혈통적 민족주의를 넘어 ‘시민민족주의(civic nationalism)’를 지향한다. 혈통을 벗어나 영토 내의 동일한 정치 체제를 수용하는 모든 구성원을 민족으로 새롭게 규정한다. 국가주의 통일론이 통일이라는 목표에 주안점을 두는 반면 시민사회 통일론은 소통의 정치, 자발적 참여의 과정을 중시하는 점도 주요한 차이다.

글=천인성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17세기 북벌론 발상, 21세기에 되풀이 말자” 인문학의 힘 보여준 무한상상

이번 학술대회의 가장 큰 특징은 통일 문제를 놓고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머리를 맞댔다는 점이다. 철학·인류학·국문학·역사학·언론학 등 인문학이 통일문제에 적극 목소리를 냈다. 신선한 접근이었다. 그 동안 통일 문제는 사회과학(정치학·경제학)의 전유물이었다. 정치·외교·경제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통일 담론에 인문학은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까.

인문학의 힘은 무한한 상상력이다. 그 힘으로 기존 정치경제식 토론의 식상함을 극복하고자 했다. 지나친 엄숙주의는 잠시 괄호에 담아두었다. 통일 관련 토론회에서 좀처럼 듣기 힘든 발언이 쏟아졌다.

◆‘통일’ 아닌 ‘통합’의 길=“통일이라는 주술에서 벗어나자”는 과감한 발언이 나와 참석자를 놀라게 했다. 김재용(원광대·국문학) 교수의 제안이다. 김 교수는 ‘남북 문화교류를 통해서 본 비민족주의적 통합의 단초’를 발표하며 “다양한 문화교류를 통해 일회적이고 정치적인 ‘통일’과 다른 장기적인 ‘통합’의 차원을 개척해나갈 것”을 주문했다. 진정 통일을 원한다면 통일이란 용어 자체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통일이 너무 정치적 층위에서만 논의되면서 자유로운 상상을 제한하고 있다”는 지적은 새겨들을 만했다.

정태헌(고려대·한국사) 교수는 ‘17세기 북벌론과 21세기 북벌론’을 대비시켜 눈길을 끌었다. 17세기 조선이 국제정세의 변화를 못 읽고 북쪽 청나라를 공격하려했던 무모한 발상을 21세기에 되풀이하지 말자는 주장이었다. 상상력의 마당에서 몇 세기 정도를 뛰어넘는 일은 예사였다. 정 교수의 결론도 ‘통합’의 길을 찾는 일과 유사했다. “사람과 물자와 돈, 그리고 문화와 학술이 오가는 남과 북의 교류협력이 결국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했다.

북한 출신 새터민을 한국에 사는 다른 외국인과 같은 차원으로 바라보자는 이수정(북한대학원대 인류학) 교수의 주장은 이틀간 계속 화제였다. 북한 출신이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하거나 특별한 시선으로 보지 말고 다문화 가정처럼 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다문화 가정이 확산됨에 따라, 이제 통일도 ‘민족의 재결합’만으로 볼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남북한 넘나들며 영화 만든 신상옥=상상력은 자유를 기반으로 한다. 정치경제 위주의 학술회의라면 언급조차 되지 않았을 소재가 과감히 주제로 떠올랐다. 영화감독 신상옥(1926~2006)의 경우가 그랬다. 1950~70년대 남한에서 최고의 스타 감독이자 제작자였던 그는 78년 홍콩에서 돌연 실종된다. 6년 후인 84년 체코 영화제에 북한 감독으로 참가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사건 당시엔 금기 사항이었고, 지금은 남북한 모두에서 아예 평가 대상 밖에 놓여있는 잊혀진 인물이다. 하지만 ‘남북한 모두에서 영화를 만든 인물’이라는 렌즈로 포착하니 그의 삶이 다르게 보인다.

이상우(고려대·국문학) 교수는 “분단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한 예술가의 표본”으로 신 감독의 삶을 부각시켰다. 신 감독이 무슨 대단한 정치적 이념을 지닌 ‘통일 운동가’였다는 얘기는 아니다. ‘영화에 미친 사나이’가 오직 자신의 영화를 위해, 분단시대를 배경으로 영화 같은 삶을 살다 갔음을 주목해보자는 것이었다. 그가 북한에서 만든 일곱 편의 영화도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성숙함으로 미루어볼 때 포용할만한 수준이라고 했다.

통일 논의를 철학적으로 보다 폭넓게 자리매김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김형찬(고려대·철학) 교수는 “한반도 차원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인류가 당면한 전지구적적 문제를 푸는 방향과 맥을 같이해야 한다”며 “친환경·에너지 위기·지속 가능한 발전·문화적 다양성·창조적 자본주의·핵무기 없는 세계 등의 문제를 놓고 세계와 호흡을 같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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