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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와 이코노미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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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쑤저우에서 상하이 푸둥 공항으로 가던 버스가 마구 헤맨 끝에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큰소리 탕탕 치던 버스 기사가 기어이 일을 저질렀다. 주말이라 33명의 좌석 구하기는 하늘에서 별 따기. 천행으로 좌석을 구했는데 그나마 연발해 공항에서 7시간여를 기다리게 됐다.

할 일 없이 싱거운 대화들이 오간다. 공항 영화 ‘터미널’ 얘기부터 지난 2월 농심배 얘기도 나온다. 이창호 9단 혼자 중국 기사들을 연파하고 한국에 우승컵을 안겨줬던 그 극적인 승부 이야기. 그러다가 무심히 터져 나온 이상한 스토리 하나가 귓전을 친다. “그때 이창호 9단은 혼자 이코노미 타고 갔대요.”

이코노미라. 이번에도 다 이코노미 타고 다니는데 뭐 이상한가. 아니다. 임원들은 비즈니스, 당장 시합해야 할 딱 한 명의 선수인 이창호는 이코노미라는 그림이 좀체 그려지지 않는다. 이창호를 쓱 보니 눈 감고 졸고 있다. 재미있는 이창호. 수줍음이 너무 많은 그는 10월의 결혼식도 주례도 없고 축의금도 하례객도 없이 가족끼리만 치른다고 한다.

물어보니 한국기원 규정에 임원들은 비즈니스, 선수들은 이코노미를 타게 돼 있다고 한다. 그래, 규정이라면 지켜야지. 그래도 뒤에서 혼자 가는 이창호가 서운하지 않았을까. 기사들은 큰 대회서 상금을 벌면 10% 정도를 한국기원에 낸다. 수없이 우승한 이창호가 낸 돈은 얼마나 될까.

잊으려 해도 다시 그놈의 이코노미가 머리를 자극한다. 공항 귀빈실을 이용해 본 한 후배가 “가만 있으니까 수속 다 해주고 참 좋데요. 그래서 출세하려는 것 아니겠어요” 하던 말이 생각난다. “오히려 번거롭더라”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회의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특권도 퍼스트 클래스에 귀빈실 이용이란 얘기도 있다. 그런데 왜 국보 기사라는 이창호는 이코노미를 타나. 이창호가 성공한 기사가 아니면 누가 성공한 기사인가. 내가 속물인가.

아무래도 그럴 리 없어 이창호 9단에게 물어봤더니 “무슨 얘긴지 모르겠는데요”라는 무심한 대답이 돌아온다.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해요”라며 물어 본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본다.

그런 건가. 어떤 이에겐 박 터지는 일이 이창호에겐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최강자들에게 기적 같은 3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경지에 오른 승부사의 마음은 그래야 하는 것인가. 여행하다가 또 배운다. 쑥스럽게도 젊은이들에게 노상 배운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