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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국가보안법이 불편한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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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월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의 운명이 판가름날 전망이다.

8.15 해방 직후는 물론 1948년 정부 수립 때까지도 보안법 같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연합국이 버티고 있어 그런 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건국 2개월 뒤 좌익이 여순반란사건을 일으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공산당의 국가 전복 기도를 막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공론이 일어났고, 일제 때 치안유지법의 악몽이 낳은 일부 반대가 있었으나 마침내 보안법은 제정.공포되었다. 이처럼 보안법의 산파 역할은 북한과 남한의 공산세력이 한 셈이다. 그 뒤 한국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갖가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보안법은 군과 함께 우리의 자유민주 국체를 지켜온 두 개의 축이었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80, 90년대에 학원을 비롯한 사회 일각이 친북 좌경화의 길을 걸었을 때 보안법은 전면에 크게 부각되었다. 보안법 법정은 체제 변혁의 집념을 숨김없이 표출한 젊은이들과, 체제 수호의 사명감에 찬 젊은 공안검사들의 치열한 격전장이 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공안검사들은 권력의 시녀인 양 매도되기 시작했고, 반면 그때의 피고인들은 민주투사로 대접받고 최근에는 권력의 핵심에까지 진출했다. 보안법 옹호론자는 수구냉전 세력으로, 폐지론자는 개혁세력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우리의 대통령마저 "보안법 같은 낡은 유물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고 공언했다.

보안법 폐지론자들의 첫번째 논거는 이 법이 정권 유지와 민주화투쟁의 억압수단으로 남용되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인권유린이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 법 집행 과정에서 그러한 사례가 분명 있었다. 고 박종철씨나 권인숙씨 등은 대표적인 희생자들이다. 지난날의 공안기관들은 이런 일을 진심으로 통회(痛悔)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부 예외적인 현상이었을 뿐 전체를 그렇게 보는 것은 사실왜곡이다. 보안법은 그동안 여러 차례 개정으로 그러한 남용의 소지를 시정하여 왔지만, 만의 하나 아직도 불완전한 요소가 남아 있다면 그 부분을 고치도록 해야지, 법 자체를 없애버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의 민주화와 인권상황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 올해 초 미국의 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한국의 정치적 자유를 7등급 중 1등급, 시민적 자유는 2등급의 인권선진국으로 평가했다. 인권 때문에 보안법을 폐지하자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이 법이 남북의 화해와 교류협력을 저해하고 나아가 평화통일에 장애가 된다는 주장 또한 옳지 않다. 화해와 협력은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북한의 노동당 규약은 변함없이 '당의 최고목표는 한반도의 공산화'라고 선언하고 있고, 지난해 4월 그들의 형법 개정으로 사상범 처벌을 강화한 바 있다. 생사가 달린 북핵문제는 어느 쪽으로 불똥이 튈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북한이 보안법을 싫어하고 불편해하면서 집요하게 그 철폐를 요구하는 것은 이 법이 그들의 목적 달성에 최대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남한의 인사들이 여기에 맞장구를 쳐서야 되겠는가.

보안법은 태생적으로 한시법(限時法)이다. 그들이 대한민국을 해치려는 의도가 없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해지면 보안법은 저절로 용도 폐기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 시기가 아니다. 보안법 폐지론 외에 '형법 보완론'이니 '대체 입법론'만 해도 그렇다. 그러한 주장들이 현 보안법의 실질적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는 쪽이라면 이는 음식을 담는 그릇의 차이에 불과한 비본질적인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보안법의 핵심내용을 빼버리거나 법 실행을 형해화(形骸化)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오늘날 북한의 지도부와 남한 내의 친북세력을 제외한 일반 국민은 보안법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80% 이상의 국민이 보안법 폐지에 반대하고 있다. 지난해 우리 대법원도 보안법 폐지론을 경계하면서 "나라의 체제는 한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인 만큼 한치의 허술함이나 안이한 판단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결국 보안법은 낡은 유물로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려 들 게 아니라, 오히려 날을 예리하게 잘 손질해 요긴할 때 쓸 수 있도록 머리맡에 놓아두어야 할 것이다.

김경한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