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음식 간을 맞추듯 인생의 간을 맞추는 게 차’라던 여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한국의 차(茶) 문화는 오랜 전통을 가졌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맥이 끊기다시피 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식민지 시절에 차는 멀고 먼 얘기였다. 그 와중에 한국 전통 차문화는 점점 사라져갔다.

그런 차 문화를 복원한 이가 명원 김미희(1920∼81) 선생이다. 쌍용그룹 창업주 성곡 김성곤 씨의 부인이었던 그는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차를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을 적극 후원한 ‘숨은 공로자’였다.

학고재에서 그의 일생을 엮은 책 『차(茶)의 선구자 명원 김미희』를 펴냈다. ‘명원 김미희’를 추억하는 이들을 일일이 찾아가 인터뷰하고 엮은 책이다. 명원의 둘째 딸인 김의정(서울시 무형문화재 궁중다례의식 보유자) 불교 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이 그 일을 맡았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궁궐의 상궁에게서 궁중 다례를 직접 익혔다.

책에는 법정 스님에 대한 일화도 담겨 있다. 서울 봉은사의 다래헌에 법정 스님이 머물 때 명원은 종종 차를 보자기에 싸서 가져갔다. 두 사람은 만나서 늘 불교와 차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 당시 차담을 통해 ‘차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 선사에 대한 재조명과 그의 자취가 깃든 대흥사 일지암에 대한 복원도 시작됐다.

한 번은 법정 스님이 어머니와 함께 온 어린 김의정씨에게 이렇게 물었다. “작은 보살은 차가 뭐라고 생각하나?” 대답은 이랬다. “어머니께서는 차는 간을 맞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식의 간을 맞추듯 인생의 간을 맞추는 것이 차라고 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은 이 답을 듣고 파안대소했다. 그리고 붓을 들고 찻주전자와 찻잔을 그린 뒤 글을 남겼다. ‘홀로 마신즉 신기롭더라.’

이어령(전 문화부 장관) 중앙일보 고문이 쓴 책 표지의 추천사가 눈길을 끈다. ‘명원 김미희 선생은 현대사의 뒤편에서 빛나는 보석이다. 그는 안으로 다지면서 뒤로 물러서길 원했다. 가뭇없이 사라질 우리 차문화를 일으켜 세웠고, 소외 받은 여성의 시대적 사명을 일깨웠다. 이 책에는 뒤편에 섰던 그를 앞세워 추모하려는 사람들의 기원이 담겨 있다.’

백성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