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서가] 『괭이부리말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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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실 통계청장

우리 집은 부부가 책을 좋아하다 보니 서가에 늘 책이 넘친다.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간 서재를 넘어 온 집 안을 책이 점령해 버릴 태세다.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서가에도 ‘질량불변의 법칙’을 엄격히 적용한다. 새로 들이는 수만큼 소용이 적은 책을 솎아내 남에게 선물도 하고 필요한 곳에 기증도 한다.

내게 독서란, 머리로 읽는 책이 있는가 하면 가슴으로 읽는 책이 있고 또 눈으로만 훑는 책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서가에 온전히 두고 싶은 책은 ‘가슴으로 만난 책들’인데, 그중에서도 『괭이부리말 아이들』(창비)은 더욱 특별하다.

이 책은 10여 년 전 고등학생이던 딸이 읽을수록 가슴이 따뜻해지는 책이라며 내게 권해 줬다. 작가의 실제 경험이 녹아 있는 이 소설은 삶이 힘겨운 달동네 이야기를 담았다. 가난의 덫에 걸려 빠져나올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관심과 이해와 사랑으로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생각이 지나치게 복잡해지기도 한다. 아직은 구석구석 미치지 못하는 복지정책, 소득불균형 해소,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적 배려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매사 복잡할수록 해법은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법이다.

책 마무리 부분을 보면, 이 가난한 동네의 기억을 애써 외면하려던 선생님 명희가 이곳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 짐을 싸며 이런 다짐을 한다. “10층짜리 아파트에서 다락방으로 이삿짐을 옮기면서 명희는 다짐을 했다. 다시는 혼자 높이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겠다고.”

나는 이 소설에 공감한 많은 사람이 나처럼 이 구절에 밑줄을 그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이 책을 덮은 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몇 배 더 깊고 넓어졌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곳이 통계청이다 보니 업무 자체가 딱딱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더욱 냉정한 태도를 보여야 할 때도 있다. 가끔은 이러다가 내 가슴까지 차갑게 굳어버릴까 봐 걱정도 된다. 어쨌든 그럴 때마다 내 내면에 따뜻함을 가득 채워 주는 책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누구나 세상을 각박하게 살다 보면 내 가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조차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잊었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떤 동기만 있으면 그것은 금세 다시 살아난다. 이 시대의 리더를 자처하는 정치인이나 학자도 많지만, 척박한 가슴에 따뜻한 사랑을 채우고 사람들 사이에 간극을 메우는 이런 책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의 리더가 아닐까.

이인실 통계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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