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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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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내 어찌 알겠는가, 그의 열정이 정치적임을. 낭만적이지 않고, 가정적이지도 않음을. 내 어찌 알겠는가, 그가 대영박물관 도서관의 책장 넘기는 소리에 묻혀 지낼 것을. 좁은 방 세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듯…."

카를 마르크스의 아내 제니가 남긴 '마르크스에 대해'의 일부다. 빈처의 회한이 느껴진다. 무심한 철학자는 런던 시내 구석방에 처자식을 남겨두고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처박혀 혁명의 이론화에 몰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행복했을 것이다. 조국인 프러시아에서 쫓겨나 프랑스.벨기에를 방황한 끝에 겨우 정착할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런던은 연구 대상인 자본주의의 본산이었다. 착취당하는 노동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고, 혁명에 의해 전복될 자본의 모순을 예측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자본론'(1864년) 등 명저를 쏟아냈다. 그러나 1883년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마르크스가 묻히던 날 조문객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영국에선 계급혁명의 투사를 구할 수 없었다"라고 프랑스 역사가 앙드레 모루아는 정리했다. 영국 노동자들이 이미 혁명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몸은 조합운동이, 머리는 페이비언 사회주의가 지배했다. 페이비언은 로마 장군 파비우스(Fabius)가 한니발을 지구전으로 물리쳤듯이 점진적인 개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타개하겠다는 개량주의다. 영국에선 '자본론'출간 40년 전 노조가 합법화됐다. '자본론'출간 무렵 전국조직이 만들어졌고, 40년 뒤인 1906년에는 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했다. 노조 합법화 100년 만인 1923년 노동당이 정권을 잡았다.

노조운동의 선진국인지라 노동귀족이란 말도 영국에서 비롯됐다. 원래는 고임금을 받는 숙련공들이 무산자라기보다 유산계급적인 사고와 생활 패턴을 지니기에 붙여진 비아냥이다. 요즘 전문직을 노동귀족이라 부르진 않는다. 대신 노동귀족이란 말은 관료주의화된 일부 노조 간부에게 더 어울리게 됐다. 영국에선 상대적으로 노조의 관료주의가 덜하다. 페이비언 사회주의가 도덕성을 강조한 덕분이다. 페이비언이 사회주의를 이념적 지표로 고수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발전, 도덕성의 향상을 믿고 지향하기 때문이다. 계약직 채용에 뒷돈 챙기는 행태는 노동귀족이란 표현을 넘어서는 타락상이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