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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자국민 챙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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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미군이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 장기 억류해온 '불법 전투원(Enemy Combatant)' 가운데 영국 국적 4명이 25일 풀려났다. 남아 있는 550여명 가운데 영국인은 아무도 없다.

지난해 풀려났던 5명은 영국에 도착해 며칠간 간단한 조사를 받은 다음 아무런 법적 조치 없이 석방됐다. 이들은 미국 국방장관을 상대로 배상금 1000만달러를 청구하는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번에 풀려난 4명 역시 비슷한 절차를 거쳐 풀려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 경찰로 넘겨진 이들은 3년 만에 가족과 변호사를 만났다.

관타나모엔 어느 나라 누구가, 무슨 혐의로 잡혀 있는지조차 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군은 최근 이들을 거의 반영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감옥(캠프6)을 짓고 있다. 미군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알카에다 캠프에서 테러 훈련을 받았거나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테러리스트다. 풀려난 영국인들 역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등 이슬람 국가 출신으로 현지에서 붙잡혔다. 영국 정부는 종교나 피부색이 어떻든 자국 국적을 가진 이들을 데려가기 위해 지난 3년 내내 미국과 협상을 벌여왔다. 이번에 석방된 네명 가운데 한명은 미군이 특별군사법정에 첫번째로 세우려 했던 유력 용의자다.

영국의 외교적 성과다. 그동안 토니 블레어 총리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잭 스트로 외무장관은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데이비드 매닝 대사는 콘돌리자 라이스 보좌관을 상대로 철저한 맨투맨 작전을 펼쳤다. 영국의 총리.장관.대사는 각각 미국 측 파트너와 개인적으로 절친한 것으로 유명하다. 블레어 총리는 '부시의 애완견(푸들)'이란 소리까지 듣는다. 매닝 대사는 라이스의 깜짝 생일파티까지 준비해 화제가 됐다. 겉으로는 자세를 잔뜩 낮춰 온갖 비아냥을 받지만 속으로는 철저히 자국민을 챙겼다.

영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미국에'할 말은 하겠다'고 큰소리치지 않는다. 하지만 외국에 나가 어려움에 처한 자국민을 방치하는 일도 결코 없다.

오병상 런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