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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61) 군대가 움직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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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새로 모집한 신병들이 전선으로 나가기 전 서울시청 앞을 행진하고 있다.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로 추정된다. 시청 청사 벽면에는 ‘나서라 대한남아, 징병은 우리 의무’ ‘맘놓고 싸워라, 뒤는 내가 맡았다’는 글귀의 표어들이 걸려 있다. 미국 종군기자 존 리치가 촬영한 것으로 『컬러로 보는 한국 전쟁』(서울셀렉션)에 실린 사진이다.

소비에트 지구.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제도와 이념을 구현하는 곳이다. 그 소비에트 지구가 48년 어엿한 독립국가로 출범한 대한민국 영토 안에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6·25전쟁으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겪고 있던 대한민국의 숨통을 조이고 드는 또 다른 형구(刑具)였다.

6·25가 터지면서 남으로 내려왔던 북한군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대거 후퇴하는 과정에서 미처 북으로 돌아가지 못한 낙오병이 많이 나왔다. 이들 대부분은 포로로 잡히거나 아군에 의해 사살됐지만 일부는 38선 이남의 대한민국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전쟁 전부터 활동했던 많은 빨치산도 남쪽으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을 따라다니면서 갖은 만행을 저지르다가 북한군 부대가 후퇴하는 시점에서는 함께 밀렸다. 그러나 그들의 북상(北上) 길은 자주 막혔다. 그들보다 훨씬 기동력이 뛰어났던 미군과 유엔군들이 38선의 길목에 먼저 도착해 그들의 퇴로(退路)를 막았기 때문이다.

아군이 빨치산의 활동 무대였던 호남과 지리산 지구를 수복한 때는 50년 10월 중순께였다. 마산 일대에서 북한군 6사단을 방어했던 미 25사단은 진주와 하동을 거쳐 10월 3일에야 광주를 수복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진 지 18일이 지난 뒤였다. 동부전선에서는 이미 국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을 하던 시점이었다.

전북 일원에서 아군이 북한군을 몰아내는 데는 거의 20일이 걸렸다. 그동안 벌어졌던 좌익과 빨치산, 북한군 패잔병의 만행은 앞 회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다. 그 틈을 이용해 그들은 지리산을 비롯한 산간 지역으로 몸을 숨겼던 것이다. 수복한 지역에서는 좌익에 가족을 잃은 우익 인사들이 보복극을 펼쳤다. 그러나 그 보복은 좌익의 주변 인물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좌익 활동을 펼쳤던 핵심 인물들은 이미 산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이들을 토벌하는 임무는 국군 11사단이 맡았다. 사단장은 최덕신 준장이었다. 그는 나중에 해외로 나갔다가 입북해 북한에서 여생을 마쳤다. 국군 11사단을 이끌고 빨치산 토벌에 나섰던 사람이 나중에 북한으로 갔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1사단은 토벌 과정에서 거창 양민학살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다. 씻을 수 없는 죄였다. 수백 명의 양민이 국군의 총구 앞에서 숨져간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수비를 위한 방벽을 견고하게 쌓고 들판을 비워 적을 없앤다는 ‘견벽청야(堅壁淸野)’의 독한 토벌로 빨치산이 상당한 타격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51년 초에는 11사단의 강력한 토벌로 인해 빨치산이 세력을 크게 잃은 상태였다. 그러나 산발적으로 벌이는 빨치산의 준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빨치산에 큰 힘을 보탠 것은 북으로부터 침투해 들어오는 북한의 유격대였다. 그중에는 이현상의 부대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현상의 부대는 후퇴하는 북한군을 따라 북상했다. 그러나 50년 12월 중순 이들은 충북 단양 일대에 나타났다. 북한 지도부로부터 “제2 전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받고 남하했던 것이다. 이들이 처음부터 지리산을 목표로 남하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엔군과 중공군이 대치하는 주 전선 바로 뒤에서 유격대 활동을 하면서 전선을 교란하는 게 주요 임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몇 군데를 거쳐 내려오다가 결국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이들 외에 25, 27, 29연대와 각종 지원 부대를 통합한 북한군 10사단, 유격 1지대와 3지대 등도 대구 등 대한민국의 후방 지역으로 침투했다. 대부분은 국군과의 교전으로 상당수 병력을 잃었지만 나머지는 계속 남하해 지리산 등 산간 지역에 숨어들었던 것이다. 원래의 빨치산과 북한군 낙오 부대, 새로 침투한 유격대 등이 모여 들었던 지리산의 ‘소비에트 지구’는 대한민국 속의 다른 ‘북한’이었다. 이곳에는 낮 몇 시간 동안만 출입이 가능했다. 어두운 밤에는 언제 어디서 총탄이 날아들지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지리산에서 다시 토벌에 나섰을 때는 인근 주민들이 “최근에는 지리산 근처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전라선 철도는 수시로 끊겼다. 경부선도 빨치산이 거센 공격을 해오면서 가끔 위험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지리산 인근의 경찰서는 자주 불에 탔다. 기습적으로 치고 내려오는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아예 경찰서가 없어지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이들의 활동을 막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북으로부터 김일성 군대, 남쪽으로는 점차 세력을 넓혀가는 빨치산에 의해 협공(挾攻)을 받아야 하는 형국이었다. 나는 무거운 짐을 다시 어깨에 얹은 셈이었다.

51년 10월의 어느 날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전주였다. 부대 이동과 임무는 기밀(機密) 사항이었다.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작전 계획을 마친 나는 아침 일찍 전용 지프에 몸을 실었다. 내 부대의 이름은 ‘백 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 국군 부대에 지휘관의 이름을 붙인 첫 사례였다.

나를 따르는 사령부 본부 요원은 약 500명. 이들은 트럭에 나눠 타고 내 뒤를 따랐다. 내가 이동을 명령한 토벌 부대는 동해안과 강원도 양구에서 출발해 지리산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지리산은 어느덧 찾아온 가을을 맞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전운(戰雲)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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