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과 인터넷 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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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의 승리는 '386세대'와 인터넷세대의 합작품이다. 그런데 386과 인터넷은 원래는 전혀 상반된 세계관을 상징한다. 386세대는 국내정치현실에 몰입했던 세대다. 그들은 민주화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미국·일본 등을 '신, 구 식민지세력'으로 간주하는 이념적인 구도를 받아들이면서 '반독재 투쟁'과 '반외세 투쟁'을 병행시켜 나갔다. 그 결과 한국의 민주화에는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지만 외세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불식되지 않으면서 폐쇄적인 민족주의가 뿌리내리게 됐다.

반면 인터넷은 국경과 문화의 장벽이 사라진 '세계화'된 세계를 상징한다. 특정 정부가, 종교가, 문명권이 결코 간섭할 수 없는 자유로운 의사와 정보의 교환이 가능한 세계가 인터넷의 '바다'다. 가장 민주적인 동시에 가장 국제화된 장이 인터넷이다.

그렇다면 386세대와 인터넷은 어떻게 결합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볼 때 인터넷은 386세대의 세계관을 전파시키고 결집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다시 말해 가장 폐쇄적인 세계관이 가장 개방적인 매개체를 통해서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됐던 것이다.

인터넷이 민족주의와 결합돼 그 힘을 과시한 첫 사례는 지난번 겨울 올림픽에서 한국의 김동성 선수가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에 의해 미국의 오노 선수에게 억울하게 금메달을 빼앗겼을 때였다. 이때 한국의 네티즌들은 올림픽위원회의 홈페이지는 물론 한국에 불리한 보도를 한 미국 언론사들의 홈페이지를 마비시키는 '괴력'을 보여줬다.

지난 6월 전국을 달궜던 붉은 악마의 함성 역시 인터넷이 그 힘을 과시한 경우였다. 한국 국가대표팀이 축구의 열강들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민족의 우수성과 실력을 과시하자 오랫동안 외세에 억눌려 살아온 민족적 자긍심이 표출되었다. 붉은 악마 현상 역시 뭐니뭐니 해도 배타적인 민족주의의 분출이었다. 그리고 그 민족주의는 인터넷을 통해 엄청난 동원력을 보이면서 결집될 수 있었다.

다음으로 386과 인터넷이 만난 것은 미군에 의해 희생된 여중생들을 추모하기 위한 전국적인 시위를 통해서였다. 정부와 여론이 이러한 집회의 반미주의적 경향을 애써 축소시키려 했지만 '반외세'주의는 이 모든 집회의 저변에 깔려있는 가장 확실한 이념이었다. 미국 국무부의 홈페이지를 '다운'시킨 한국의 '네티즌'들은 다시 한번 민족주의와 인터넷의 결합이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2002년 대선은 이러한 일련의 '연습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강력한 '망'을 형성한 386세대와 인터넷이 그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첫 장을 제공해 주었다. 투표당일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근소한 차로나마 앞서가자 오후 들면서부터 노무현 후보의 지지자들이 인터넷 캠페인을 시작했다. 수만에서 수십만의 인파를 삽시간에 동원할 수 있고 상대방의 홈페이지를 '다운'시킬 수 있는 맹렬 네티즌들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고 그 결과 오후부터는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제는 인터넷을 반 외세의 이념과 구호로 가득 채워서는 안된다. 盧당선자가 한국 정치에 그토록 오랫동안 몸담아 오면서 미국을 한번도 방문해본 적이 없다는 것은 극렬한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무엇이 문제냐고 할 수도 있고 또 나름대로 '원칙'을 지켰음을 방증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의 폐쇄적인 세계관의 반영일 수도 있다.

이제 盧당선자는 인터넷을 386세대의 이념을 전파시키는 도구로 사용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그는 오히려 인터넷을 그 본래의 취지대로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인터넷은 보다 큰 바깥세상을 알고 받아들이는 데 사용돼야 한다. 외국을 '외세'로만 간주하지 않고 상대하고, 협상하고, 이용할 줄 아는 넓은 안목과 지식·포용력을 갖춰야 한다. 386컴퓨터로는 인터넷 사용이 불가능하다. 인터넷의 모든 가능성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큰 용량의 컴퓨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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