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승복 모르는 노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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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대의원대회도 정상적으로 치르지 못하는데 무슨 놈의 총파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회를 바꿔야 할 노동운동가들이 가장 더러운 집단들이 하는 짓을 따라하고 있다."

21일 새벽까지 장장 13시간이나 계속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의결 정족수 미달로 자동 폐회되자 한 조합원은 이렇게 분통을 터뜨렸다.

20일 오후 3시부터 속리산 유스타운에서 열린 이번 대회는 시작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이날 논의될 다섯가지 안건 중 첫째 안건(지난해 사업 및 결산 승인)은 오후 8시부터 논의가 시작돼 오후 11시가 지나서야 끝났다.

지도부 방침에 반대하는 대의원들이 사사건건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문제 제기라기보다 고의적인 의사지연 전략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참석 대의원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회의가 시작될 때 538명이 등록했지만 1차 안건 표결에는 436명만 참석했다.

회의장 주변에선 핵심 안건인 노사정 대화 복귀를 반대하는 측에서 표결이 불리해지자 대의원들을 빼 표결 자체를 무산시키려 한다는 말이 나돌았다. 행사장엔 "현재 대의원 현황으로 볼 때 불리하므로 표결을 강행하려 한다면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유인물이 나돌기도 했다.

회의가 길어지면서 숙소에 자러 가거나 차를 타고 밖으로 빠져나가는 대의원들이 계속 늘었다.

셋째 안건인 '2월 총파업 계획'을 결의할 때는 399명만이 남아 의결정족수(393명)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대의원 이탈은 계속돼 정작 노사정 대화 복귀안을 논의할 때는 의결 정족수에 미달하고 말았다. 국민적 관심이 모였던 민주노총의 노사정 대화 참여가 표결도 해보지 못하고 무산되는 어이없는 장면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일부 대의원들이 보여준 모습은 참여와 토론, 결과에 대한 깨끗한 승복이라는 민주적 합의원칙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시간 끌기, 집단 퇴장 등으로 판을 깨려는 일부 정치인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연상시켰다.

정철근 정책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