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인권 짓밟은 'X파일' 테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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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유명 연예인 125명의 신상과 사생활을 담은 메가톤급 소문 폭탄이 한반도를 강타했다. '연예인 X파일'이라 불리는 113쪽짜리 문건이 그것이다. '영 맹한 애'라는 심히 모욕적인 표현부터 '소속 기획사 정 사장과 내연의 관계라더라'는 근거 없는 소문에 이르기까지 온갖 저열한 표현으로 넘쳐나는 이 자료는,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한국 인터넷의 활력 덕분에 이미 조기 진화가 불가능해 보인다. 명예롭게도(?) 이 문건에 거론된 인물 중 상당수는 불미스러운 평판의 유포에 따른 심적 고통과 경제적 불이익을 피할 수 없게 돼 버렸다. 피해 규모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파일을 제작한 모 광고회사는 광고 모델의 미스 캐스팅으로 인한 광고주와 광고 제작자의 손실을 사전에 통제할 목적으로 정보를 수집했으며, 정보를 유출한 것은 용역회사 직원의 개인적 과실이었다고 해명한 바 있다. 그러나 해명 문건 어디에도 사생활 정보를 수집하고 문건화하는 행위의 불법성에 대한 인식이 보이지 않는다. 해당 광고회사는 문건의 제작을 위한 자료수집 과정에서 소문의 진위를 자주 캐물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소문은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정보라는 전제 하에 사실정보와 동일한 비중으로 수집됐음을 의미한다. 그 정보가 다수에게 공유될 때 발생할 개인적 인권 침해의 가능성은 도무지 안중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심한 도덕 불감증, 안전 불감증이다.

영업상 이익을 위해 특수 정보를 수집했다면 이에 대한 철저한 보안 유지를 강구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해명 문건 어디에도 보안 유지에 실패했음을 자성하는 언급이 없다. 자료를 만들고 이용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을 뿐 애당초 그런 노력은 하지도 않았던 것으로밖에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한 사람의 연예인에게 재기 불능의 타격을 줄 수 있는 악성 루머들을, 글 읽을 줄 아는 국민이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작성해 놓고도 특별한 보안조치 없이 허술하게 관리했다면 그것은 고의에 가까운 명예훼손이라고밖에 해석할 방도가 없다.

몇년 전 유사한 경우로 이른바 'O양 비디오'사건이 있었다. 개인의 사생활이 포르노로 인화돼 온 천하를 떠돌았던 그 사건은 당사자의 사회적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렸고, 그녀를 갑자기 혹독한 절망의 세월 속으로 몰아넣었다. O양은 과연 그토록 가혹한 처벌을 감수했어야 할 만큼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얘기인가?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와 네티즌의 무책임한 호기심이 결탁해 빚은 가공할 테러일 뿐이다. 정보의 신속한 유통과 민주적 공유를 가능케 한 인터넷은 그 이익만큼이나 위험성도 높다. 차제에 그 위험을 통제할 장치를 개발하지 않는다면 이 같은 사태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인터넷을 이용한 개인정보 유포의 예방과 처벌, 그리고 피해자 보상에 대한 법률이 절박한 것은 그 때문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를 '고도 위험사회'라 명명한 바 있다. 생활의 편의를 위해 개발된 기술들이 인간 사회의 안전을 일거에 위협하는 파괴적 무기로 돌변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사람들의 주관적 기억 속에 불안정하게 묻혀 있어야 할 개인들의 사생활을 불과 이삼일 만에 불특정 다수의 뇌리에 고정된 형태로 실물화한 이번 사건은 그 가능성을 섬뜩하게 현재화한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 마지막 판단 주체는 여전히 개인이다. 이번 사건에서도 남의 사생활 정보를 유출하는 것은 불법이며, 위험하다는 판단을 조금이라도 했더라면 오늘과 같은 대량 유통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의 궁극적 책임은 자신들의 피해로 돌아올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적인 것을 퍼 나르기 좋아하는 네티즌에게도 있다.

이재인 서울대 여성연구소 선임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