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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세상으로의 변화가 꼭 정치로만 이뤄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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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에릭 홉스봄은 20세기가 낳은 대표적인 역사가다. 그가 『흥미로운 세월들: 한 20세기적 삶』(Interesting Times)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가을 자서전을 펴냈다. 1917년생이니 러시아혁명을 현대사의 시작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현대사의 증인인 셈이다. 그는 런던의 실패한 유대계 사업가 아버지와 역시 유대계인 작가 지망생 어머니 사이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책과 이념에서 탈출구를 찾았던 베를린과 런던의 사춘기를 거쳐 케임브리지에서 보낸 대학시절,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늦깎이 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은 그야말로 흥미롭다. 끼리끼리 인정하고 격려하는 좌파의 '문화적 게토'에서 벗어나 우파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학문적 성취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마침내 그것에 도달한 그에게 우선은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또 베를린의 소년 공산주의자 시절부터 영국 공산당이 해체될 때까지, 당적을 버린 적이 없는 완고하면서도 유연했던 이 20세기 역사가가 걸어온 길은 그 자체로 20세기 지성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케임브리지 간첩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회고, 강경파들의 비판을 무릅쓰고 당의 재정 지원을 받는 잡지 『오늘의 맑스주의』(Marxism Today)에서 진보/보수의 열린 포럼으로 만들어간 과정 등에는 관념의 미학에 연연하지 않고 현실과 대면하려는 좌파 역사가의 고민이 묻어 있다.

뿐만 아니다. 프랑스·이탈리아·미국·중남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과의 교류와 그에 얽힌 에피소드들, 즉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런던대학의 마르크시스트 과학사가 버널의 아파트에 피카소가 직접 그려 준 벽화 이야기, 런던의 최고급 백화점 '헤롯'에서 알제리 해방전선 투사들에게 전달한 시한폭탄 타이머를 산 한 프랑스 공산주의자의 이야기 등이 그야말로 고급한 위트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자전이라는 형식 때문이겠지만, 국내에서도 이미 번역 출판된 『혁명의 시대』에서 『극단의 시대』에 이르는 그의 4부작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생동감이 있다. 가벼우면서도 무겁고 무거우면서도 충분히 가볍다. 또 생을 충만하게 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이 책의 곳곳에 묻어 있다. 당연히 영국의 역사학자들은 만나면, 자연히 그의 책이 화제에 오르게 된다. 초점은 아무래도 '당과 역사가'의 관계가 아닐 수 없다.

좌파지만 당에는 비판적이었던 한 친구는 그 유명한 '공산당 역사가 그룹'의 세미나에는 당원증이 없으면 출입할 수 없었다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다른 친구는 20세기사 연구를 의식적으로 멀리했다는 대목을 들어 결국은 공산당을 탈당하지 않은 것이 지장을 준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한 점의 얼룩도 묻히지 않은 삶은 불신한다. 그의 사색이나 활동반경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멀리서 대선 정국을 바라보면서, 내 흥미를 끈 대목은 뜻밖에도 68년 혁명에 대한 홉스봄의 회고다. 유네스코 학술대회 때문에 우연히 파리의 거리에서 68혁명을 목도하였지만, 당시에는 그 혁명의 의미가 잘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패러다임으로 보자면, 아무래도 그것은 혁명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회고컨대 68혁명의 의미를 자신이 너무 과소평가했다며, 그는 65년을 오히려 20세기의 전환점으로 설정한다.

정치적 의미는 전혀 없지만, 프랑스 의류산업에서 처음으로 여성용 바지 생산량이 치마 생산량을 넘어서고 가톨릭 사제 지망생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해가 바로 65년이었다는 것이다. 정치행위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청바지의 진출이 20세기 후반기의 진정으로 중요한 지표로 평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나이에 청바지를 입는 것은 피터 팬 콤플렉스가 아닌가 되물으면서….

이 글이 서울의 신문에 게재될 즈음이면 대선 결과가 이미 판명됐을 것이다. 그 결과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홉스봄이 인정했듯이, 세상은 반드시 정치를 통해서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의 의미를 무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과잉의 논리 자체가 지배 헤게모니의 게임규칙에 말려드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처럼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겠지만, 정치가 그것을 보장하는 것만은 아니다. 게다가 아직 청바지를 입을 수 있을 만큼 젊은 바에야….

<한양대교수,미 하버드대 방문학자 겸< p>

영 글래모건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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