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힘이 역사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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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6대 대선 전이 마무리됐다. 당락의 희비가 극적으로 엇갈리는 만큼,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명암도 더욱 강렬하다. 패자가 쓸쓸하게 퇴장하는 반면 승자에게는 갈채와 조명이 집중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냉정한 정치의 세계일 것이다. 피를 말린 박빙의 싸움은, 이긴 자의 절제된 겸양과 진 자의 담담한 승복에 의해 더욱 빛난 것이 되었다.

각종 현안과 문제가 산적해 있는 만큼 대통령당선자에게 거는 기대도 크다. 고난에 찬 그의 정치적 역정과, 그 고난에 대해 용기로 맞섬으로써 비로소 오늘의 자리에 이를 수 있었던 당선자의 이력이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배가시킨다. 상식이 배반당하고 원칙이 훼손되기 일쑤였던 현실 정치 판에서, 바로 상식과 원칙을 지렛대 삼아 고투해 온 한 정치인이 결정적인 싸움에서 이겨 시민들과 함께 활짝 웃는 모습은 우리들에게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러나 냉엄한 현실 앞에 환호와 기쁨은 순간일 뿐이다. 축제의 밤이 지나가면, 누추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당선자는 여전히 소수 정치세력만을 이끌고 있으며, 열광적 지지층도 가지고 있지만 당선자의 능력과 정책에 대해 아직 못미더워하는 반대자들도 그에 못지 않게 많은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바로 이 때문에 5년 전 이맘 때 국내외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등장했지만 지리멸렬한 상태로 끝나가는 '국민의 정부'의 행로가 현 대통령당선자에게 중요한 반면교사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하면 대선에서의 승리는 오직 불확실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최초의 결정적 승리라고 해서 통치의 어떤 성과를 자동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한 최종적으로 정치는 결과에 의해서만 평가되기 때문이다.

한 정권의 할 일이 크게 내치와 외교로 나뉘어진다면 현 대통령 당선자는 국내적으로는 통합과 경제 세우기의 과제, 그리고 밖으로는 민족생존의 문제가 걸린 국제 정치적 난제를 성공적으로 풀어야 한다. 따라서 새로 출범할 정부의 과업은 참으로 엄중한 바 있다. 지난 10년간 민주주의의 공고화 과정을 비싼 대가를 주고 학습한 깨어 있는 시민들은 눈을 부릅뜨고 새 정부를 주시할 것이며, 중대한 시행착오는 더 이상 쉬이 용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당선자는 초심을 잃지 말고 두루 인재를 구하되, 서두르지 말고 일관되게 일을 꾸려나가야 할 것이다.

북핵 문제나 뜨거운 대선 전으로 특징 지워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참으로 다사다난했다는 특별한 감회를 갖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의 흐름 자체가 그런 역동성을 내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불과 반세기의 역사가 분단과 전쟁, 압축성장과 군사독재, 그리고 민주화의 숨가쁜 도정으로 연이어 점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이런 불가측성과 우리 고유의 활력은 한국 역사의 질곡이면서 동시에 행운으로 평가돼야 마땅하다.

즉 역사적 사건들의 불가측성과 우연성이 너무 지나쳐도 곤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미래의 역사가 우리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역사의 주체로서 떠오른 시민들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역사 자체가 전혀 새롭게 기술될 수 있다는 현실적 가능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불어닥친 여러 바람들과 예측불허의 반전이 승패를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든 16대 대선 과정은 우리 역사의 이런 개방적 특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우여곡절로 가득 찬 한국 현대사도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전진해 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모든 발자국들은 참여하고 발언한 보통사람들에 의해 비로소 어렵게 내디뎌진 것이다. 결국 시민의 힘만이 우리의 역사를 바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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