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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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21세기 국가의 진운을 국민은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맡겼다. 그가 내세운 '낡은 정치의 청산과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국민적 호응의 결실이다. 그 승리와 환희는 '노무현 정치'가 연출한 감동의 드라마다. 파란만장한 국민 경선과 후보 단일화에는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켜온 승부사의 면모가 돋보였고, 국민은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 박빙의 승리에 얽힌 선택의 쾌감만큼이나 패자 쪽의 허탈감은 크다. 대통령 당선자의 우선 과제가 대통합이어야 한다는 점을 실감시킨다.

盧당선자는 공약대로 국민대통합의 시대를 열어 갈라진 민심을 추슬러야 한다. 지역감정의 장애물을 과감히 치워야 한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영·호남 간 극명한 지지율 편차가 나타났다. 유권자들은 지역 감정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 절제의 뒷전에서 심한 편가르기는 여전했다. 5년 전 DJ 승리 때처럼 90%를 넘는 호남의 절대적 지지가 盧당선자로 옮겨졌다.

대선의 또 다른 특징인 세대 간 갈등 치유에 힘을 쏟아야 한다. 20∼30대와 50대 이후 유권자 사이의 뚜렷한 지지 성향 차이는 전례가 드물다. 그 편차에는 나이 차이에서 오는 의식·정서의 단순한 간격과 다른 이념적 갈등이 드러난다. 盧당선자를 바라보는 중·노년 세대의 눈길에는 역사관·이념에 대한 불안감이 깔려 있다.

국력 결집을 위해 이런 분열상 치유가 시급하다. 승자의 관용을 통한 노장청(老壯靑), 보수와 진보세력의 화합이 절실하다. 패자도 결과에 승복해 대통합에 동참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盧당선자는 건강한 개혁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야 한다. 그의 승리는 낡은 3金정치의 종식과 함께 새 정치의 장을 열어야 한다는 시대정신을 선점(先占)한 덕분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청산은 첫번째 실천과제다. 권력 집중의 자발적인 거부는 정치문화 변화를 위한 자기희생이 될 것이다. 낡은 정치 청산의 실험이 될 민주당의 재창당에도 건강한 개혁주의 정신이 충만해야 한다.

희망의 새 정치는 DJ정권 때 국민적 갈등을 야기했던 이념의 편향성이 드러나선 안된다. 포퓰리즘적(대중 영합주의) 개혁은 국민을 고단하게 하고 국정 혼선으로 이어진다. 대선 때 표심을 잡으려 했던 감성과 이미지 정치는 한계가 있다.

DJ정권과의 결연은 盧당선자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그 자세는 DJ정권의 인사 실패·부패·실정(失政)과의 철저한 결별로 이어져야 한다. 'DJ정권 2기'라는 딱지가 붙지 않도록 해야 한다. 통합의 리더십은 승리의 논공(論功)과 연고에 의존하지 않는 탕평(蕩平)의 인사에서 나온다.

내년 경제 전망은 대체로 우울하다. 盧당선자의 등장에 대해 재계는 긴장한다. '투명, 공정한 시장'이란 그의 대기업 정책에 대한 불안감일 것이다. '당장은 불편하지만 시장이 효율화돼야 경쟁력이 생긴다'는 그의 구상이 성과를 얻기 위해선 정책의 우선순위와 완급(緩急)을 짜임새 있게 조절해야 한다. 글로벌 시대의 경제는 글로벌 잣대와 틀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과거 정권과의 차별화·단기 실적을 의식하는 경제운용은 금물이다.

행정수도 이전 공약은 격렬한 선거 쟁점이었다. 그것은 盧당선자에겐 역사적 업적을 이루는 기회일 수 있고, 임기 중 만성적인 논쟁거리가 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국가 1백년 대계(大計) 속에서 최종 결정돼야 한다. 국민적 공감대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선결 과제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국정의 첫 단추는 낮은 자세의 권력 관리, 국민 대통합의 열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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