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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8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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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무 거나 다 잘 먹는다는 우리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농부는 신이 났는지 열무김치와 새우젓 놓고 물 말아서 먹는 우리 옆에서 담배를 말아 피우며 이제는 반말로 연신 말을 시켰다.

-저 거시기 이박사는 머하러 하와이로 갔남. 기양 여그서 사는거시 나슬 텐디. 허긴 그려, 생떼 겉은 젊은 것덜이 많이 죽었는디 워찌 한국서 살겄어. 남덜이 모두 그러더먼, 허정씨 입장에서야 보내 줘야겠다더먼.

이후 가는 곳마다 이를테면 읍내 이발소 앞이나 시장 국수 좌판 같은 데서 아저씨나 노인들을 만나면 으레껏 당대의 정치 얘기가 훈계 조나 비판적으로 흘러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젊은 학생들인 우리 정견을 묻는 것이었을 텐데 시골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신문을 샅샅이 훑어보지 않던 우리로서도 딱 부러진 견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때에는 아마도 배운 사람이 별로 없던 일제 때의 생각이 남아 있어서 그랬는지 고등학생을 아이 취급하지는 않던 시절이었다.

그때에는 무슨 열성으로 그렇게 고적지를 찾아 다녔는지 모르겠다. 아마 국토를 샅샅이 알아버리겠다는 듯한 열성이었을 것이다. 무너져가는 백제의 돌탑 아래 주저앉아 쉴 적에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어찌나 쓸쓸하고 고즈넉했는지 광길이와 나는 서로 말을 시키지 않고 두어 시간쯤 풀밭에 주저앉아 있었다.

공주를 거쳐서 부여로 넘어갔는데 거기서 서울 문리대생 두 명을 만났다. 그들의 제안대로 부여 군수 집으로 찾아갔다. 관사는 호젓한 언덕바지에 있었던 것 같은데 물론 군수는 부재중이었다. 일하는 소녀가 내다보고 들어가더니 과연 대학생들이어서 그랬는지 명함과 함께 인근의 식당을 일러 주었다. 길 떠난 이래 처음으로 이른바 '왕건이'가 들어있는 갈비탕을 처음 먹었다. 대학생 형들과 우리는 모두 국물도 남기지 않고 먹어버렸는데 콧등과 목덜미가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부여에서 낙화암에도 올라가 보았고 지금도 타버린 군량이 나온다는 싸움터도 돌아다녀 보았다. 부여는 그때에 가보고 평생을 그 부근으로 지나쳐 다니면서도 어쩐지 다시는 들를 기회가 나지 않아서 지금도 묘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진에서 가끔 볼 적마다 어릴적 그 풍경들이 아슴프레하게 그야말로 수백년 전의 일처럼 떠오를 뿐이다. 우리는 그들과 헤어져서 논산으로 향했고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왜 그렇게 보자고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기묘하다. 광길이는 수첩에 깨알같이 써둔 '견학' 대상 목록 위에 작대기를 찍 긋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질 않았다. 나중에 택이와 우석이의 방랑담을 들었을 때 우리가 얼마나 모범적인 여행을 했었는지 후회가 될 정도였다. 벌써 관촉사의 마당에 들어섰을 때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솔가지를 때는 연기가 기분 좋게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절 마당을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공양주 할머니에게서 그야말로 갓 쪄낸 하지 감자를 한 바가지 얻어다 비가 내리는 대웅전 뒷모퉁이 처마 밑에 서서 후후 불며 먹었다. 아직 저녁이 되려면 멀었지만 그게 우리의 저녁밥이었던 셈이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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