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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람] "풋풋한 토기의 매력에 푹 빠져 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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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토기 수집가로도 유명한 최영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왼쪽 작은 사진들은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토기들 가운데 일부.김성룡 기자

"거칠고 거무튀튀해 보이는 토기(土器)엔 산골 처녀처럼 풋풋한 매력이 있습니다. 무엇이라도 포용할 듯 너그럽고 넉넉하고 당당한(寬厚堂堂) 품격도 있지요."

지난해 말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 최영도(67) 변호사가 펼쳐놓은 토기 예찬론이다. 최 위원장은 일반에겐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회장과 참여연대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고미술계에선 진작부터 토기 수집으로 명성이 자자한 터였다. 2000년 6월, 20여년에 걸쳐 모은 토기 1580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선뜻 기증해 세간의 화제가 됐던 그가 19일 '토기 사랑 한평생'(학고재)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 속엔 양립하기 힘들 듯한 변호사와 토기 수집가로서의 치열한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73년 '사법권 독립 침해 사례'라는 문건을 만들었다가 유신헌법 시행과 함께 '해직 판사'가 된 그는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고, 차츰 생활의 안정을 찾으며 고미술 수집 취미를 갖게 됐다. 그러다 83년 역시 고미술 수집가인 최용학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토기 사랑의 외길로 빠져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서화와 도자기에 치여 토기가 푸대접을 받는 사이에 숱한 명품들이 외국으로 반출되고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토기의 씨가 마르기 전에 어서 사들여 전문박물관을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죠."

이후 그는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는 한편 일주일에 너댓번씩 서울 장안평과 인사동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그 바람에 골프를 끊고 술집 나들이도 삼가 친구들과도 소원해졌다.

"다른 데 쓰는 시간과 돈이 아깝더라고요. 하루치 그린피면 토기가 몇개인데 싶고…."

몇만원짜리부터 집 한채 값에 이르는 것까지 토기 컬렉션이 1000점을 넘어서자 최 위원장은 "과년한 딸의 혼처를 찾지 못한 아비처럼 초조한 심정이 됐다"고 한다. 혼자 힘으로 수백억원이 드는 전문박물관을 세우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뒤였다. "귀중한 컬렉션이 후손에 의해 풍비박산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봤기 때문에 내가 갑자기 죽으면 토기들이 어찌될까 싶어 전전긍긍했지요."

고민 끝에 1580점의 '딸'들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시집 보내던 날 최 위원장은 "이 녀석들이 내 슬하를 떠나 괄시받으면 어쩌나 해서 가슴앓이를 적잖이 했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전 용산에 새로 짓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곤 그런 걱정을 접었다. 그의 이름을 딴 55평짜리 별도 전시실에서 상설 전시를 할 수 있게끔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월에 박물관이 문을 열면 그동안 모아놓은 29점의 토기를 추가로 기증할 겁니다. 그리고 자식같은 토기들을 보러 자주 갈거예요."

신예리 기자 <shiny@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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