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칼럼] 중국 시장이 원하는 건 ‘라오펑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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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국내 패션시장에서도 이들 브랜드의 약진이 예사롭지 않다. 유행의 산실이자 패션 1번지인 명동은 글로벌 브랜드 차지다. 토종기업들에는 명품보다 이들 브랜드가 훨씬 위협적인 존재다. 이들은 한국을 동아시아 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 있어 공세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한다면 ‘쌈지’ ‘톰보이’와 같은 토종 브랜드의 비운은 계속될 것이다.

사실 패션 분야에서 우리 기업들의 사업 역량은 이들 못지않다. 그래서 자라·H&M의 성공은 국내 기업들엔 위기인 동시에 희망이다. 그중에서도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시장 규모도 세계 최대인 중국에 우리 기업들의 진출이 가장 활발하다. 이랜드와 진출 시기가 비슷한 기업도 있고, 뒤늦게 뛰어드는 기업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지만 성공한 기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올해는 이랜드의 중국 진출 17년이 되는 해다. 중국 시장의 상반기 매출이 5000억원을 넘었으니, 올해 연 1조원 돌파가 가능하리라 예상된다. 하지만 10년 전 매출은 고작 100억원 남짓이었다. ‘만만디(漫漫的·천천히, 여유 있게를 뜻하는 중국어)’ 중국시장에서 당장 기대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낙담하거나 포기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중국 시장에 진출해 성공하려는 기업들엔 왜 사업이 답보상태인지 명확한 원인 분석을 거쳐 처방을 내리라고 조언하고 싶다.

기본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특히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해외에서는 더 그렇다. 이랜드가 중국 진출 이후 가장 노력을 기울인 것은 철저하고도 장기간에 걸친 시장조사, 그리고 현지화였다. 직원들은 6개월간 중국 관련 서적을 100권 이상 읽으며 200여 개의 도시를 발로 뛰어 조사했다. 발 디딜 틈 없는 3등 완행열차를 짧게는 5시간, 길게는 30시간을 타며 쩐(우리나라의 읍에 해당) 단위까지 샅샅이 살폈다. 밤에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자료를 분류하고 정리했다. 오지 시장조사 때는 강도를 만난 적도 있다.

이렇게 치열하게 미묘한 각 지역 간 시장의 차이를 찾아내지 못하고선 지역마다 패턴·디자인·색상을 어떻게 차별화할지, 중국만을 위한 디자인 조직은 왜 따로 두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방도가 없다. 지금도 신입사원들은 1~2주에 걸쳐 중국 시장조사를 의무적으로 한다. 참신한 시각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지만 일찍이 시장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

성공을 위한 의도된 현지화로는 중국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현지화 그 자체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들의 문화와 사상을 이해하고 중국인을 존중하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일부러 중국인들이 사는 동네에 집을 얻었고, 같은 음식을 먹고 마시며 동화되려 했다. 초창기엔 직원 자녀들을 중국인 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연간 100조원가량으로 추산되는 중국 패션시장은 2020년에는 지금의 20배 규모로 커질 전망이다. 10년 후 중국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패션기업이 꿈이지만 그보다는 10년 후에도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오랜 친구 같은 ‘라오펑요(老朋友)’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

최종양 이랜드 중국법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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