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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발]이덕화·엄정화도 '머리' 썼다 가짜머리, 화려한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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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6면

가발업계가 중흥기를 맞고 있다. 탈모용 가발이 잘 팔리는 데다 여성용 패션가발 시대도 열리고 있다. 가발 전문업체인 우민무역이 불씨를 지폈다. 탈모용으론 탤런트 이덕화씨가 모델로 나오는 하이모가, 패션 가발에선 가수 엄정화씨를 모델로 쓴 발란이란 브랜드가 떠들썩하게 등장하면서 가발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다. 지난 10월 1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이른바 로데오거리가 가발 쓴 미인들로 눈길을 끌었다. 우민무역이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편 대로변에 패션가발 전문점을 오픈한 것을 기념하는 이벤트였다.

'염색 대신 가발을''멋과 유행을 가발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우민무역은 그동안 만들어 오던 여성용 패션가발에 '발란'(Vallan)이란 브랜드를 붙이고 직영 판매점 1호를 개점했다. 발란은 '반란(反亂)'을 소리나는 대로 영문으로 옮긴 표현이다. 그런 후 19일 늘씬한 도우미들이 빨갛거나 노랗고, 길거나 짧은 등 형형색색의 가발을 쓰고 거리를 활보하도록 했다. '발란 베스트 모델 콘테스트'를 개최했고, 가발을 쓴 자신의 모습을 티셔츠에 찍어 선물하는 등 각종 이벤트 행사도 열었다. 가발은 그동안 치부(恥部)를 감추는 음지의 상징이었다. 그런 가발이 이젠 '뷰티(beauty)산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양지로 나오고 있다는 신호탄같은 행사였다.

가발 전문업체 밀란 김현식 부장은 "가발업계가 재인식되면서 영세 가발 업체들이 속속 창업되고 있을 정도로 호황"이라고 밝혔다.

대표적인 사양산업으로 낙인

가발은 향수(鄕愁)같은 존재다. 1960년대 방물장수와 엿장수들이 동네를 누비며 '머리카락 삽니다'를 목청높이 외치던 시절, 여성들은 앞다퉈 삼단같은 머리를 잘라 이들을 찾아와 '쌀 한되'와 바꿔갔다. 이런 머리카락이 가발로 변해 미국과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 수출되면서 가발은 합판·섬유 등과 함께 3대 수출상품으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80년대 들면서는 생산·수출액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사양산업으로 전락했다.

가발은 또 노동력 착취의 상징이었다. 79년 이른바 'YH사태'는 단적인 사례였다. YH무역은 당시 국내 최대의 수출가발업체였지만 저임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종업원들이 파업을 벌였고, 이를 무리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노조 간부가 변사체로 발견됨으로써 YH는 문을 닫았다. 이것이 계기가 돼 국내에서의 대규모 가발 생산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게다가 가발 생산업체가 대체 몇 개인지, 생산·판매액 등은 얼마나 되는지 등도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이·미용사들도 조합이 있지만, '머리를 만드는' 가발업계는 있던 협회조차 사라졌다.

그래도 수출은 꾸준

국내에선 자취를 감췄고 통계도 제대로 안잡히지만, 가발수출은 그런대로 꾸준하다. 해외에 이전된 공장을 통해서다. 80년대 이후 국내 가발업체들은 생산라인을 대부분 중국 등 해외로 옮겼다. 인건비가 오른데다 장시간 노동을 할 근로자를 구하지 못해서다.

우민무역은 중국 칭다오(靑島)등 세곳에 종업원 1천∼1천5백명 규모의 공장을 갖고 있다.

우민무역과 더불어 국내 3대 가발업체에 속하는 다이넥스(옛 보양산업)는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지로 공장을 이전했고, 밀란은 베트남의 공장과 계약을 체결해 기술을 이전하는 대신 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OEM)으로 물건을 납품받고 있다. 여기서 생산된 제품은 대부분 미국과 일본 등지로 직수출된다.

우민과 다이넥스의 경우 연간 수출실적이 2천만∼3천만달러씩 된다. 우민무역 유근직 차장은 "해외 공장에서의 직수출을 포함하면 국산가발은 대략 세계 시장의 60% 전후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고급화로 내수 겨냥

수출은 그런대로 하면서 주목받지 못한 것은 내수 기반이 취약한 데다 독자 브랜드가 없던 때문이 컸다. 수출도 모두 OEM이다. 그래서 우민무역은 고급화를 지향하려면 '브랜드'가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99년 탤런트 이덕화씨를 모델로 해서 히트를 치고 있는 하이모가 첫 작품이다. 가발을 쓴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음지'상품을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양지'상품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이모는 출시 첫해 30억원 매출에서 지난해 1백11억원, 올해는 1백70억원을 예상할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다.

탈모용 가발 전문생산업체인 밀란도 올해 1백억원대의 매출 목표를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밀란은 머리카락을 받쳐주는 망사의 바깥부분을 살색으로 만들어 가르마를 해도 전혀 표시가 안나도록 하는 앱솔루트 브랜드로 히트했고, 올해는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매트릭스 브랜드를 개발했다.

패션 가발의 브랜드화는 올해부터 시작이다. 우민무역 홍인표 회장은 "가발업계에도 본격적인 마케팅 전쟁이 시작됐다"고 볼 정도다. 탈모용 가발은 기본 수요가 있지만, 패션 가발은 마케팅 노력 여하에 따라 시장이 크게 확대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염색 대신 가발을 사 쓰고, 직장에 나갈 때와 모임에 참석할 때 등 상황에 따라 가발을 달리 쓴다면 시장규모는 엄청 커질 수 있다. 90년대 중반부터 '스칼렛'이란 브랜드를 개발해 대성공을 거뒀던 다이넥스의 경험이 있기도 하다. 성공하면 수출도 OEM에서 벗어나 독자 브랜드로 할 생각이다. "세계 최대의 가발업체인 일본 아데랑스를 앞지르는 게 목표"라고 홍회장은 밝혔다.

이에 발맞춰 기술개발 투자도 활발하다. 사람 머리털(인모)외에 폴리에스터 원사 등 머리카락 소재도 다양해지고 있다. 밀란은 두꺼운 인조 피부 대신 아주 가느다란 특수 섬유를 사용하고 있고, 망사 구조로 만들어 통풍을 잘되게 했다. 우민무역은 머리카락을 투 톤(2-tone)컬러로 개발했고, 요즘은 맞춤형 가발에 사용하기 위한 3차원 두상측정기를 산학협동으로 개발 중이다. 정밀하게 가발을 맞출 수 있는데다 측정된 머리 본이 인터넷 통신을 통해 공장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가발 맞추는데 걸리는 시일도 대폭 줄어든다.

글=김영욱 전문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young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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