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곡유통위 역할은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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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양곡유통위원회가 내년도 추곡수매가 결정을 놓고 인상·인하의 복수안을 제시한 것은 세계무역기구(WTO) 농산물 개방을 코앞에 두고도 여전히 갈피를 못잡는 정부의 농정 행태를 답습하는 것 같아 한심스럽다. 농민과 소비자단체가 평행선을 달려 의사결정이 쉽지 않은 위원회의 속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동안 많은 논란 끝에 경쟁력있는 농업을 만들자며 궤도를 수정한 농업정책의 방향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농촌 현지 쌀값은 올해 좋지 않은 작황으로 추수기에도 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고령화와 소득 불안 등 어두운 농촌 현실도 달라진 게 없다. 이런 상황이니 위원회가 내년도 추곡수매가의 대폭 인하안을 정부에 건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안팎의 농업 현실이 이런 미적지근한 대응을 용납하지 않으며, 시간도 촉박하다는 점이다. 일본·대만까지 쌀시장 개방으로 태도를 바꾸었으며 협상 시한 2년을 앞둔 지금 우리만이 개방하지 않고 있는 외톨이다.

쌀 개방에 대한 최선의 대비책은 국내외 쌀 가격차를 줄여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자면 가격 지지보다 소득 지지 정책으로 과감한 전환이 불가피하고 그런 정책 추진의 신호가 이번 추곡수매가안에 반영됐어야 했다.

상황이 거기에 이르지 못한 데는 정치권과 정부의 탓도 크다. 여야 모두 대선을 앞두고 농민에게 철저한 현실인식 위에 농정 전환이 필요함을 설득하기보다 선심 쓰기에 분주하다. 농림부는 지난해 양곡유통위가 건의한 추곡수매가 인하안을 동결로 되돌린 당사자였다.

공이 넘어온 이상 농림부가 개방에 대비한 최선책을 찾아야 한다. 양곡유통위도 발전적 변화를 모색할 때가 됐다. 추곡수매량이 전체 쌀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로 쌀값 조절 기능이 줄고 있다. 마침 유통위도 스스로 폐지를 건의하는 모양새다. 차제에 양곡관리법을 고쳐 추곡수매가에 대한 국회 동의도 종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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