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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185> 럭셔리 브랜드 이야기 ① 샤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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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한국은 명품 친화적인 나라다.” 국제컨설팅업체 맥킨지 보고서의 내용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한국민 절반가량이 전년보다 더 많은 명품을 구입했다네요. 그런데 우리는 과연 명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젠 브랜드의 역사와 철학 정도는 알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매달 한 차례 연재할 ‘브랜드 스토리’에서 명품에 대한 상식을 키우십시오. 첫 얘기는 ‘샤넬’입니다.

이도은 기자

샤넬은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이 세운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다. 맞춤정장·기성복·핸드백·향수·화장품까지 만들고, 명품 중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브랜드로 꼽힌다. 현재 샤넬은 초창기 샤넬의 파트너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아들인 알랭 베르트하이머와 제라드 베르트하이머가 공동 소유하고 있다. 국내에는 1997년 갤러리아 압구정점에 첫 부티크를 연 뒤, 2010년 7월 문을 연 강남신세계 부티크까지 모두 9개의 로컬 부티크가 있다.

옷으로 여성을 해방시킨 여자, 가브리엘 샤넬

샤넬의 디자인은 창시자인 가브리엘 샤넬(사진)의 스타일이 여전히 살아 내려오고 있다. 그는 1883년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12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후 수녀원에서 자란 그는 당시를 “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회고했다. 18살에 ‘생트마리’라는 봉제회사에 취직했지만 바느질이 지겨워 카페 가수가 됐다. ‘로퐁드 뮤직홀’이라는 카페에서 부른 ‘누가 코코를 보았는가’라는 노래로 인기를 모으며 이때부터 코코라는 애칭을 얻게 된다. 중요한 인연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경주마 소유주인 에티엔 발상을 알게 되면서 일생에 걸쳐 영감을 준 승마복의 세계에 입문했고, ‘애인이자 오빠이자 아버지였던’ 보이 카펠과도 대면했다. 카펠의 바지·파자마·모자·재킷 등은 후에 샤넬이 여성복으로 다양하게 변주해냈다.

1910년 샤넬은 프랑스 파리 캉봉가에 모자 가게 ‘샤넬 모드’를 냈다. 카펠에게서 종잣돈을 빌렸다. 이곳은 이내 여배우와 부유층 여성들 사이에 화제가 됐고, 이후 도빌·비아리츠·칸 등에 ‘메종 샤넬’이라는 부티크를 잇따라 열었다.

“예상을 뒤엎는 요소를 갖췄을 때 패션은 성공한다.” 샤넬은 코르셋부터 던져버렸다. 단순한 디자인에 편안하고 활동적인 옷을 만들어냈다. 두 팔을 자유롭게 하는 숄더백을 고안했고, 액세서리와 보석을 디자인해 ‘토털룩’이라는 용어를 생성시켰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패션계를 떠났지만 은퇴는 길지 않았다. 15년 뒤 전설적인 패션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그리고 단 몇 시즌 만에 트위드 슈트, 퀼팅 가죽의 2.55 백, 투톤 슈즈 등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샤넬의 시대가 끝났다고 여겼던 사람들을 비웃으며 지금의 ‘샤넬 스타일’을 완성시켰다. 당시 71세였다. 그리고 1971년, 평생 몽유병에 시달렸던 그는 영원히 잠들었다. 봄·여름 컬렉션을 열기 며칠 전이었다.

‘샤넬’하면 떠오르는 아이콘 6개

“차별화되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할 수 없어야 한다.” 샤넬은 20년대부터 스타일의 정수를 강조하고 특정한 몇 개의 아이콘을 사용했다. 그녀만의 상징적 코드였다. 리틀 블랙 드레스-투톤 슈즈-트위드-2.55 백-까멜리아 등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 샤넬만의 트레이드 마크다. 또 ‘넘버5’는 세계 최초의 디자이너 향수로 지금까지 샤넬을 대표한다.

펌프스 형태의 투톤 슈즈.

①리틀 블랙 드레스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 이하 LBD)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언제나 떼어내고, 절대 덧붙이지 말라”는 샤넬의 디자인 원칙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옷이다. LBD가 처음 선보인 1926년 당시엔 혁명에 가까웠다. 칼라·단추 하나 없는 디자인, 목이 올라오고 소매는 붙는 디자인 때문에 ‘럭셔리의 낙오주의’ ‘빈약한 옷’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하지만 미국판 보그는 이를 ‘샤넬의 포드’라고 불렀다. 20년대 모던함의 상징인 포드 자동차에 버금가는 디자인이라는 뜻이었다. 이 드레스는 오늘날에도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먼저 선택받는 아이템이다. 여기에 포인트로 화려한 보석 하나만 걸치는 스타일링도 변함없는 패션 공식이다.

2010 가을·겨울 레디투웨어 컬렉션에서 선보인 리틀 블랙 드레스와 트위드 재킷·스커트

②투톤 슈즈 앞코 부분만 다른 색깔로 덧대 만든 ‘투톤 슈즈’는 샤넬만의 시그너처다. 전체적으로는 베이지 톤이면서 앞부분만 검정으로 처리된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옷차림에 맞춰 신기도 편하지만 다리를 길어 보이게 하고 발을 더 작아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두 가지 색깔로 된 남성용 구두 ‘스패츠(spats: 발목 조금 위까지 미치는 짧은 각반)’에서 따온 디자인이다. 지금도 샤넬의 컬렉션엔 유행과 관계없이 플랫·부츠·에스파드리유의 다양한 투톤 슈즈가 선보인다.

③트위드 재킷·스커트의 끝단과 소매에 다른 색깔의 테이프를 두른 듯한 디자인의 트위드 아이템은 대표적인 ‘코코 샤넬’ 아이템이다. ‘영국 친화적’인 샤넬이 날씨가 안 좋을 때도 승마를 즐기던 영국 귀족의 담요에서 트위드를 착안했다. 현대적이면서도 트렌드에 쏠리지 않는 우아함이 매력. 특히 60년대엔 세상을 풍미한 디자인이기도 하다. 재클린 케네디, 모나코의 그레이스 왕비, 로미 슈나이더, 제인 폰다도 샤넬 트위드 애호가였다. 트위드는 여전히 시즌마다 수천 가지 새로운 버전이 등장한다.

샤넬의 대표적인 가방 ‘2.55 백’

④2.55 백 1955년 2월, 체인 끈이 달린 샤넬의 숄더백이 등장했다. 이름은 ‘2.55 백’. 제작 날짜를 기념한 명칭이다. 디자인은 볼륨감을 주기 위해 경마 경주 때 기수들이 입었던 누비 재킷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 더블 C 로고를 가장 위쪽에 스티치하고, 다이아몬드 또는 헤링본 패턴으로 가방을 누볐다. 도금된 직사각형의 잠금장치와 가죽이 꼬인 체인 줄은 샤넬의 클래식 룩을 만들어냈다. 가죽 소재의 가방이 일상적이고, 이브닝 파티를 위해 저지·실크 소재의 2.55 백도 선보였다.

모자 장식으로 쓰인 샤넬의 상징 ‘까멜리아’.

⑤까멜리아 샤넬이 가장 좋아했던 꽃은 일본의 장미라고도 불리는 동백(까멜리아)이었다. 그는 이 꽃이 액운을 없애준다고 믿었다. 기하학적 도형 같은 동그란 형태, 순수하고 맑은 컬러, 꽃잎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까멜리아는 완벽한 단순미였다. 까멜리아는 드레스·스웨터·벨트·머리띠 등 샤넬의 어느 제품에나 장식으로 사용된다.

⑥샤넬 NO.5 마릴린 먼로가 “잠옷 대신 샤넬 넘버5를 입는다”고 말한 일화로 유명해진 향수다. 1921년 샤넬은 향수 크리에이터 에르네스트

최초의 디자이너 향수인 ‘넘버5’.

보에게 지금까지 맡을 수 없었던 고급 향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5가지 향기를 만들었고, 샘플로 작은 병에 담아 샤넬에게 보여주었다. 샤넬은 하나하나 향을 맡아본 후 맨 마지막에 맡은 향, 숫자 5라고 적힌 라벨이 붙어 있는 병을 선택했다. “넘버 5가 좋아요.” 이 한마디에 향수의 고전 NO.5가 탄생했다.

샤넬의 상속자,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명품이라고 영원하지는 않다. 과거의 명성을 뒤로하고 트렌드에 밀려 사라지기도 한다. 샤넬이 지금껏 패션계를 호령하는 ‘스타일 제국’으로 살아남은 것을 창업자의 공적으로만 보는 건 무리다. 천재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사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브리엘 샤넬이 세상을 뜬 뒤, 12년간 샤넬 하우스는 수장 없이 ‘여사의 교리’를 그대로 따랐다. 샤넬로선 ‘암흑의 시절’이었다. 그러다 1983년, 칼 라거펠트가 ‘샤넬의 상속자’로 나섰다. 이미 클로에와 펜디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던 그였다. 그는 브랜드의 모든 오트 쿠튀르(고급맞춤복), 레디투웨어(기성복), 액세서리 컬렉션을 디자인했다.

그는 패션계의 구원투수였다. 새로운 브랜드보다 기존 명품을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가 손댄 브랜드마다 21세기까지 살아남은 건 우연이 아니다. 샤넬도 마찬가지다. 그는 틀에 박힌 전통을 버리고, 샤넬의 핵심 요소만 뽑아 발전시켰다. “옷은 너무 빠르거나, 늦어선 소용없다”는 그의 말처럼 클래식과 트렌드를 접목시킬 줄 알았다. 지난해 실용성과 스타일을 겸비한 ‘코코 코쿤 라인’을 내놓은 것도 그런 예다. 샤넬 여사처럼, 그 역시 아이디어가 타성에 젖으면 곧바로 거부했다.

72세 노장 디자이너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2007년엔 건축가 자하 하디드와 함께 샤넬의 움직이는 뮤지엄 ‘모바일 아트’를 선보였고, 지난해엔 중국 공략에 나서면서 상하이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냈다. 컬렉션에서도 변화를 시도한다. 그동안의 토털룩 개념에서 눈을 돌렸다. 소재·디자인·컬러 등의 ‘다양한 믹스 & 매치’를 내세웠다.

마릴린 먼로서 파라디까지, 샤넬의 뮤즈들

샤넬의 광고엔 가장 핫한 셀레브리티들이 등장한다. 1970년대 카트린 드뇌브, 2000년대 니콜 키드먼, 2000년대엔 오드리 토투와 키아라 나이틀리까지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샤넬의 뮤즈가 됐다. 샤넬 광고가 이처럼 최고의 여배우들을 내세우는 배경엔 50년대 최고의 글래머스타 마릴린 먼로가 있다. 당시 샤넬 향수 넘버5의 광고컷은 패션 마케팅 역사에서도 의미있는 광고로 기억된다.

최근엔 영화배우이자 가수인 바네사 파라디가 샤넬의 뮤즈로 손꼽힌다. 91년 코코 퍼퓸 모델로 시작해 2004년엔 캉봉 핸드백 모델로, 이듬해엔 뉴 마드모아젤 라인을 대표하는 도시적인 이미지를 표현했고, 2009년엔 상하이 공방 컬렉션의 패션쇼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올봄 칼 라거펠트는 ‘코코 코쿤’ 핸드백 라인의 새 모델로 그를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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