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사설

통일세보다 재정 건전성이 우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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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통일은 반드시 온다. 이제 통일세(統一稅) 등 현실적인 방안도 준비해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사회 각계에서 통일세를 폭넓게 논의해 주기를 제안했다. 사실 통일세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1991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초로 제기한 이후 민간 차원에서 여러 차례 논의하다 흐지부지된 사안이다. 그러나 어제 대통령이 직접 통일세를 언급한 것은 차원이 다르다. 앞으로 정부 차원에서 통일세 도입 필요성과 구체적인 준비작업이 진행될 게 분명하다.

그동안 통일세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원칙적으로 공감하지만 현실적으론 무리’라는 쪽으로 정리됐다. 우선 통일세라는 목적세(目的稅)를 신설하면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고 조세저항을 부를 수 있다. 특정 용도에만 사용하는 목적세는 재정 운용을 제한하기 때문에 선진국들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도 목적세인 방위세를 폐지했으며 현재 교육세 폐지를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그런데도 언제 이뤄질지 모를 통일에 대비해 목적세를 새로 매기겠다면 국민들이 선뜻 동의해 줄지 의문이다.

남북 통일비용도 제대로 된 추정치조차 없다. 외국 기관들이 주먹구구로 계산한 자료를 봐도 수천억 달러에서 5조 달러까지, 종잡기 힘들다. 청와대는 독일 의 경험을 참고하도록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도 통일 뒤에 도입한 ‘연대특별세’가 정확한 의미의 통일세다. 소득세와 법인세에 5.5~7.5%가 부과됐다. 독일 역시 전체 통일비용 규모가 문제였지 언제 거둘지는 그 다음이었다. 서독이 미리 10년간 매년 100억 달러씩 모금했지만 이는 통일세라기보다 우리의 남북협력기금과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전쟁·통일 같은 급변 사태에선 정부가 막대한 채권을 발행해 대처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튼튼한 재정이다. 그래야 국내외에서 쉽게 긴급 자금을 끌어모으고, 증세(增稅)를 통해 천천히 갚아나갈 수 있다. 독일이 통일 후 20년간 2조 유로(3000조원)를 쏟아부을 수 있었던 것도 재정이 그만큼 튼튼했기 때문이다. 물론 통일비용을 앞당겨 거둘 수도 있다. 그렇다고 돈을 미리 쌓아놓는 게 경제적 측면에서 꼭 효율적이지는 않다.

통일에 대비하자는 논리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세금 부담이 문제다. 천안함 사건 이후 대북 감정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부는 각종 감세(減稅)정책을 동원하고, 세종시·4대 강 사업 등으로 막대한 재정적자를 내고 있다. 통일세를 꺼내기엔 부담스러운 환경이다. “자신들은 펑펑 쓰면서 왜 우리 주머니를 터는가”라는 국민적 반감(反感)으로 번지기 십상이다.

통일세는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 위에서 추진돼야 한다. 대통령이 경축사 원고에서 마음대로 넣고 뺄 사안은 아니다. 이번 통일세 언급을 장기적 안목에서 나온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싶다. 하지만 순서가 뒤바뀐 느낌이 든다. 통일의 가장 든든한 언덕은 튼튼한 재정이다. 정부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게 우선이다. 그래야 통일세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넓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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