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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고종 울린‘가쓰라 - 태프트 밀약’뒤엔 제국주의자 루스벨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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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임페리얼 크루즈
제임스 브래들리 지음
송정애 옮김
프리뷰
381쪽, 1만6800원

숭미(崇美)· 친미(親美)파는 질색하고, 지미(知美)파는 회의에 빠질 책이다. 미국이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란 사실을 꼼꼼하게 사실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1905년 7월8일 길이가 축구장 두 배에 달하는 거대한 여객선 맨추리어 호가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났다. 배에는 앞서 7월 1일 워싱턴을 출발한 대규모 미국사절단이 타고 있었다. 훗날 대통령이 된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상원의원 7명, 하원의원 23명이 각각 부인과 보좌관을 대동했으며 무엇보다 당시 세계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맏딸 앨리스 루스벨트가 함께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든 반전영화 ‘아버지의 깃발’ 의 원작자인 지은이는 이들의 행로를 ‘제국주의 순방’이라 부르며 이면을 파헤쳤다. 하와이를 거쳐 일본·중국·필리핀·대한제국을 다니며 미국의 이익을 도모하고, 챙기고, 확인하는 이들의 행태를 중심으로, 작가는 이념적 배경, 숨은 이야기를 녹여냈는데 그야말로 가관이다.

미국인들은 인류문명의 계승자인 아리아 인의 후손을 자처하며 서진(西進)을 당연시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서부팽창사』에서 “인디언들의 삶이란 워낙 무의미하고 비참하고 흉포하다. 들짐승들에 비해 하나도 나을 게 없다”고 썼을 정도였다. 쿠바를 놓고 스페인과 전쟁을 벌인 전임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미국은 다른 나라 국민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 군대를 이끌고 그 나라를 침공해 들어갈 수 있다”며 “그 나라 국민이 미국의 도움을 원하는지 여부에 대한 결정은 미국이 내린다”고 했다. ‘정의로운 국제경찰’로서의 명분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1901년 루스벨트가 필리핀에 파견한 제이크 스미스 장군은 “나는 포로를 원치 않는다. 그저 죽이고 불태우기만 하면 된다. 무기를 들 만한 능력이 있는 자들은 모두 죽여라”란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무기를 들 만한 나이’를 열 살 이상으로 규정했다. 이후 학살과 강간이 자행된 것은 물을 것도 없다. 필리핀인들을 ‘태평양의 흑인’으로 본 미국의 사절단 대표로 태프트 장관은 필리핀 방문 때 “나는 여러분에게 독립을 주러 온 게 아니다. 때가 되면 독립을 이루겠지만 다음 세대에도, 아마도 100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개연설을 했다.

1905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육군장관을 단장으로 한 아시아 순방단은 도쿄를 방문해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와 만나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언론이 이런 보도 사진에 열 올리는 동안 ‘미국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의 밀약이 이뤄진 것이다. 사진은 일본에서 스모 경기를 관람하는 태프트 일행. [프리뷰 제공]

무엇보다 국내 독자들의 눈길을 끌 부분은 태프트 장관이 7월 28일 도쿄의 시바 궁에서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와,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는 배경과 과정이겠다. 희한하게도 미국의 일반적 정서는 일본인들이 ‘훌륭하고 문명화된 사람들’이라 인식해 ‘명예 아리아 인’ 취급을 했다. 그리고 러· 일전쟁에서 슬며시 일본 편을 들었던 루스벨트는 전쟁 중재 노력으로 1907년 미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책에 따르면 철저한 인종주의자요, 미국지상주의에 빠진 제국주의자였다. 1900년 부통령이던 루스벨트는 친구에게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길 바란다. 그러면 일본은 러시아를 저지하게 될 것이고, 일본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써 보냈다. 그랬기에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임을 인정하는 ‘일본판 먼로주의’를 부추겼고 끝내는 필리핀과 대한제국을 나눠먹기로 한 밀약을 맺었던 것이다.(이건 말 그대로 미 의회도 몰랐던 비합법적 비밀조약으로 19년이 지난 뒤에야 공개됐단다.)

그런 루스벨트에게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큰형님 미국이 우리를 반드시 도와줄 것”이라며 순진하게 매달렸다. 경성을 방문한 앨리스 루스벨트를 황제전용열차로 모시는가 하면 서양인 최초로 궁궐 여성들과 식사하도록 하는 등 정성을 다했다. 이후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루스벨트는 지원을 호소하는 고종의 밀사를 “정식 절차를 통하라”며 냉정하게 대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이미 일본에 빼앗긴 대한제국으로선 이룰 수 없는 조건을 달았던 것이다.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만 미국도 루스벨트가 잘못 꿴 ‘팽창주의 첫 단추’의 업보를 져야 했다. 지은이는 수많은 미국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간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도 루스벨트가 씨앗을 뿌렸다고 보았다. 미국인들에게는 교훈이 될 지적이다. 하지만 한국인들로선 책을 읽고난 소감이 딱 한 마디로 정리되겠다. “미국에 대한 환상을 버릴지어다”라고. 냉혹한 국제정치무대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국력을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천둥같은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김성희 기자


고종 44년의 비원
장영숙 지음, 너머북스
376쪽, 1만8000원

개화 관련서 끼고 산 고종
‘꽉 막힌 군주였다’는 편견

조선왕조를 통틀어 영조와 숙종에 이어 세 번째로 가장 오랫동안 왕의 자리에 있었던 군주. 그리고 조선조 500년의 종말을 목도한 비운의 황제. 고종(1852~1919)을 가리키는 말이다. 44년 동안 권좌에 있었는데도 정작 조선 말기의 역사에서 우리에게 각인된 인물은 흥선대원군이나 명성황후였다. 정작 고종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군주였다는 두루뭉술한 평가만 떠오를 뿐이다.

한국근대사, 특히 고종 집권기의 정치권 동향과 사상적 변화를 연구한 저자는 그게 바로 해방 후에도 확대 재생산돼 온 식민사학 때문에 형성된 편견이라고 꼬집는다. 대원군과 민비, 사대당과 개화당의 대립에만 초점을 맞춘 반면 고종 시기의 정책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은 소홀했기 때문이란다. 책은 고종을 가운데 놓고 파란의 연속이었던 한국근대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는 저자는 고종이 ‘꽉 막힌 군주’가 아니라 ‘개화정책의 선두’였다고 말한다. 집권 초기에는 대외인식도 안이했고 위정척사사상에 젖어있었지만,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개혁정책을 적극 모색했다. 연행사로 청에 다녀온 박규수, 운양호 사건 당시 일본과 교섭한 접견대관 신헌 등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이 높았던 두 사람의 조언을 수용해 개화를 추진했다.

개화 관련서를 수집하는 데도 열성적이었던 고종의 면모도 신선하게 읽힌다. 『영화지략』 『해국도지』를 늘 곁에 두고 서양 주요국의 역사와 지리를 탐구했고, 『부국책』 『만국공법』 『해도도설』 『박물신편』 등 지리와 제도, 과학에 관한 서적을 수집해 규장각에 내려 보냈다.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듯이 고종 자신도 규장각을 정치적 기반으로 만들어 나가려 했다는 해석이다.

저자는 고종이 민씨 일족의 꼭두각시였다는 세간의 평가에 반대하며 “처족을 활용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계산으로 기용”했다고 주장한다. 인사개입권을 강화해 권력기반을 확대해나가려는 의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파고가 워낙 거셌다. 저자는 고종이 개명적인 요소를 갖췄지만 “진보, 전통 유지와 개혁 추구, 폐쇄와 개방 등을 불균형적으로 구현한, 과도기의 혼란한 군주로 남았다”며 “그러나 그의 개혁 노력과 동기는 제대로 조명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종의 전 시기에 대한 정책을 꼼꼼하게 해부하면서도, 쉬운 문체로 구한말의 국내외 상황을 객관적으로 조명하려 한 시도가 돋보인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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