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역사 담긴 '고무' 지우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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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2면

몇 해 전 미국의 유명한 과학출판인 존 브록만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저명한 과학자 1백10명에게 '지난 2천년 동안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컴퓨터에서부터 피임약,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대답이 과학자들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그 중 '사이버 문화' 전문가로 꼽히는 과학저술가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매우 인상적인 답안을 제출했다. 그가 내놓은 답은 바로 고무 지우개. 거기에다 컴퓨터의 'del'키와 '화이트'·헌법 수정 조항 등을 덧붙였다. 그는 인간의 실수를 수정하는 모든 것을 꼽고 싶다고 했다.만약 되돌아가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면 과학은 물론 정부나 문화·도덕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러시코프는 주장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지우개는 우리의 참회소이자 용서하는 자이며 타임머신인 것이다.

콜럼버스가 아이티 섬에서 처음 고무를 발견하고 3백년이 지난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고무 지우개가 처음 만들어졌다. 산소와 암모니아를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과학자 조셉 프리스틀리는 연필로 쓴 글자를 주사위 모양으로 자른 고무 뭉치로 문지르면 깨끗하게 지워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전까지 빵 조각을 문질러 글씨를 지웠던 사람들에게 고무 지우개는 매우 유용하게 느껴졌으리라. 그래서 지우개의 모습으로 처음 유럽인들에게 선보인 고무를 아직도 영어권 사람들은 'rubber(문지르는 것)'라고 부른다.

물론 고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지우개가 아니라 타이어 때문이었다. 19세기 중엽 자전거나 증기 자동차에 타이어를 장착하기 시작했는데, 당시만해도 튜브 없이 속까지 전부 고무로 돼 있어 평평한 길을 달릴 때조차 덜컹거리는 진동을 느껴야만 했다고 한다. 19세기 말 공기가 들어간 고무 타이어를 자전거에 장착하고 실용화한 사람은 프랑스의 미슐랭(Michelin)이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미쉐린 타이어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초 자동차 타이어에 고무가 대량으로 쓰이게 되면서 천연고무에 관한 불행한 역사가 시작됐다. 브라질의 광대한 삼림에서 자라던 야생 파라 고무나무는 인간의 수요를 따라오지 못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자 고무업자들은 채찍질을 해가며 남아메리카 인디오들에게 고무 채집을 강요했다. 혼자서 하루 1백50그루나 되는 나무를 상대해야만 정해진 양을 채울 수 있었던 인디오들은 매일 30㎞를 돌아다녀야 했고, 어떤 지역에서는 11년 동안 4천t의 고무를 채집하느라 무려 3만명에 이르는 인디오들이 희생됐다고 한다.

몇 십년 후 이런 고무 착취의 제국주의 역사가 종식된 계기 중 하나는 천연 고무를 대신할 합성고무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은 석회와 석탄을 이용해 합성고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지우개 덕분에 필통 속 친구로 오랫동안 함께 했던 고무. 그 안에도 이런 아픈 역사가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jsjeong@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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