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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후선 김종필·오히라, 결단은 박정희·이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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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 한국측 주역은

한.일 협정의 결단을 내린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협상 방식에 대한 구상과 막후 조정, 담판과 협상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79) 전 자민련 총재와 이동원(79) 전 외무장관이 맡았다.

1961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 전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35세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박 의장의 특사자격으로 일본을 비밀리에 방문,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만나 한.일 정상회담을 제안했다.그해 11월 22일 박 의장은 이케다 총리와의 회담에서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결국 김 전 총재는 이듬해 말 도쿄(東京)에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을 만나 대일 청구자금의 규모를 타결짓고 '김-오히라' 메모를 교환했다. 김 전 총재는 이 때문에 '대일 굴욕외교'의 상징인물로 몰렸고, 여당 대표직 사퇴→외유 등 정치적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뒷날 사석에서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청구권 자금이)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김석야 공저, '실록 박정희와 김종필')

이동원 당시 외무장관은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협상대표였다. 이 전 장관은 65년 2월 방한한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일본 외상과 사흘에 걸친 철야회담 끝에 20일 새벽 요정 청운각에서 기본조약에 대한 가닥을 잡게 됐다. 시나 외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역사는 밤에 이뤄졌다"고 술회했다.

김 전 총재와 이 전 외무장관은 17일 한.일 협정 문서 공개에 대해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김 전 총재는 재일교포 신년하례회 참석차 지난 7일 일본으로 출국했고, 평창동 자택에 머물고 있는 이 전 장관도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

박소영 기자

◆한·일 수교회담 일지 그래픽 크게보기

*** 일본측 파트너는

한.일 협정의 일본 측 주역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전 총리다. 외상 재직 시절인 1962년 '김종필-오히라' 각서에 서명, 사실상 정치적 타결을 마무리한 일본 측 당사자다. 당시 한.일 협상은 한국이 청구권 자금으로 7억달러를 요구한 데 반해 일본은 7000만달러가 상한선이라며 맞서 교착상태였다. 회담의 돌파구가 된 김-오히라 각서는 '3+2+1'메모로도 불린다. '무상원조 3억달러, 유상원조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 이상'으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오히라는 72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내각에서도 외상을 지낸 뒤 78년 총리가 됐으나취임 6개월 후 갑자기 숨졌다.

김.오히라에 앞서 국교 정상화 결단을 내린 사람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총리였다. 그는 61년 11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초청, 이른 시일 안에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했다.

국교정상화 회담은 6.3사태 등 한국 내의 격렬한 반대 시위로 중단됐다. 그러자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당시 외상이 회담 재개에 나섰다. 그는 64년 한국을 방문, 김포공항에서 "양국 간 불행한 시기가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이며 깊이 반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덕분에 회담이 재개됐다. 시나 외상은 65년 이동원 당시 외무장관과 한.일 기본조약에 서명한 당사자다.

그 밖에 일본군 장교 출신인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등 물밑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위해 뛴 사람들도 많았다. 세지마는 박정희 전 대통령.김종필 전 총리 등과 막역한 관계였다. 나중에 이토추(伊藤忠)상사 회장을 지냈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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