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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자백 감형' 도입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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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 16일 대검찰청은 피의자가 범행을 자인하는 경우 가벼운 범죄로 기소하거나 구형량을 낮춰주거나, 또는 기타 범죄 혐의로는 기소하지 않는 '자백 감형'(='플리 바기닝') 제도의 도입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최근 대법원이 피의자 신문시 변호인 참여를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하고, 검찰 작성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등 피의자의 형사절차상 인권을 강조하고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하는 판결이 내려지면서 과거에 비해 수사환경이 어려워지자, 이를 타개하려는 검찰의 움직임으로 보인다.

먼저 향후 수사와 재판의 인적.물적 자원은 유.무죄를 둘러싼 다툼이 있고 사건의 죄질이 중한 사건에 집중적으로 배치되도록 형사 절차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은 많은 공감이 형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 방안이 지난해 사법개혁위원회가 제시한 '경죄법원'의 관할 확장과 활성화인지, 아니면 검찰 주도의 '자백 감형'의 도입인지, 또는 양자의 병행인지에 대해서는 주의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 일단 여기서는 플리 바기닝 제도가 도입된다고 할 경우 어떠한 전제조건이 필요한지를 검토해 보자.

첫째, 자백 감형이 헌법이 규정하는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을 권리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제도화돼서는 안 된다. 플리 바기닝은 형사사건을 사실상 검찰단계에서 종료시키므로 위헌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향후 이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그 협상은 반드시 판사의 확인을 거쳐야 하며, 판사에게 최종적인 승인권한이 남겨져 있어야 위헌의 문제가 없을 것이다.

둘째, 플리 바기닝은 모든 범죄에 대해서가 아니라 법정형 5년 이하 정도의 사건에 국한해 적용하고, 검사가 구형량을 낮출 수 있는 한도도 제한할 필요가 있다. 사실 감형 협상이라는 것 자체가 국민의 '법 감정'에 반할 수 있고, 협상 과정에서 검찰의 재량 남용이 우려되며, 또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는 범죄인이 유리한 협상 결과를 얻는 불평등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자백 감형 이전에 피의자의 범죄 관련 정보가 전면적으로 피의자와 변호인에게 공개돼야 한다. 현재 피의자의 경우 체포.구속적부심사를 청구한 경우가 아니면 수사기록을 열람.등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피의자와 변호인이 정보부족 상태에 놓이게 되어 검사와 대등한 협상을 진행할 수 없다. 플리 바기닝을 시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가 수사기록에 대한 전면적인 '증거개시(證據開示)' 제도를 시행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 플리 바기닝 과정은 물론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변호인의 참여가 철저하게 보장돼야 한다. 만약 피의자가 수사기관의 신문과 감형 협상의 과정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한다면, 그 협상은 필연적으로 피의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다. 최근 판례에 따라 피의자 신문시 변호인 참여권이 확인됐으나, 이를 보장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은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법무부와 검찰이 향후 법개정시 변호인 참여의 예외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은 주의를 요한다.

피의자가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고 관련 증거가 갖춰진 경우에도 그러하지 못한 사건과 동일하게 정규의 형사 절차를 밟게 하는 것은 인적.물적 자원의 낭비이므로, 현재의 형사 절차를 이원화할 필요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검찰의 제안처럼 플리 바기닝 제도를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그와 동시에 헌법적 원칙 준수, 피의자 인권 보장, 검찰권 남용 방지 등에 대한 고민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또한 플리 바기닝의 원조인 영미법계 국가는 물론, 비교적 근래 이 제도를 도입한 대륙법계 국가의 현황에 대한 면밀한 조사도 필요할 것이다.

조국 서울대 교수·형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