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자도 "계좌추적 거부 이해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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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산업은행에서 4천억원을 대출받는 것을 거부했다는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의 발언은 이 돈이 대북 비밀지원에 쓰였다는 의혹에 관한 결정적 증언이다. 빌린 회사의 대표이사도 모르게 대출이 이뤄졌다면 쓰인 곳도 비정상적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 이에 따라 대출금의 사용처와 대출 목적 등을 분명히 밝혀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현대상선의 관련계좌 추적을 정부가 더이상 거부할 명분이 없다는 주장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계좌추적은 안된다'는 기존 입장만을 고수, 직무유기 논란까지 일고 있다. 정부 관계자조차 사석에선 "공정거래위원회·금융감독위원회 등이 왜 계좌추적을 못하겠다고 버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할 수 있는데도 안해"=최근 정부과천청사 경제부처의 한 고위 당국자는 "공정거래법 위반혐의를 적용하든, 금융실명제법 위반을 걸든 계좌추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재정경제부는 9월 말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가 금융감독원이 반발하자 번복한 적도 있다. 금융실명제법 소관 부처인 재경부가 금감원에 계좌추적이 가능하다는 실무 검토의견을 전달했던 것.

금감원 직원노조도 여러차례 성명을 내고 "산업은행·현대상선에 대한 특별검사·감리를 실시해야 한다"면서 "특별검사는 곧 계좌추적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현행 법으로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금감원 노조는 대출 당시 산은 총재를 지낸 이근영 금감위원장이 계좌추적을 맡아 하거나, 아니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차명거래 가능성=金전사장은 "4천억원을 대출받을 이유가 없어 완강히 거부했고 서명도 안했다"고 주장했다. 이 대출금은 회사가 쓸 돈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재경부 신제윤 금융정책과장은 "차주가 현대상선으로 돼있고 상환도 현대상선이 한 만큼 차명거래는 아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석연 변호사는 "실제로 현대상선이 썼는지 불분명하다는 것이 의혹의 핵심"이라며 "회사 대표가 거부한 대출이 이뤄졌다면 차명 거래에 해당할 수 있으며, 실명제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당 내부거래=공정위는 '이상한 뭉칫돈 요구' 발언에 대해 계좌추적은 물론 부당 내부거래 조사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신빙성을 확인할 수 없고, 진실이라 해도 요구를 받았다는 것이지, 실제 뭉칫돈을 주었다는 발언은 아니므로 조사 대상이 될 만한 구체적인 혐의가 아니다"고 말했다. 공정위는 또 "계열사간 자금 거래가 있는 것만으로 부당지원 혐의가 있다고 볼 수 없으며 계좌추적은 매우 구체적인 혐의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임병일 변호사는 "직권조사의 성격상 법 해석보다는 조사기관의 판단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다른 변호사도 "이런저런 구실을 들어 걸핏하면 기업들의 계좌추적이나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해온 정부가 유독 이 건에 대해서만 못하겠다는 것은 형평에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축소 해석 논란=금융실명제법에는 ①내부자 거래 ②고객예금 횡령·무자원 입금 ③불건전 금융거래 행위 ④실명거래 위반과 장부외 거래 등 법령 위반행위에 관한 조사에 필요한 경우 금융감독원이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금감원은 이 조항에 열거되지 않은 경우에는 계좌추적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금감원 박일수 법무실장은 "실명제법의 모태인 '긴급명령' 시절에는 이런 조항이 없었지만 실명제법 입법과정에서 추가된 만큼 '엄격하고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입법 취지에 맞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이를 의도적 축소 해석이라고 반박했다. 대법원의 A 재판연구관은 "'등'이란 문구는 모든 해당 사유를 조문에 다 쓸 수 없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으로 유사한 사례는 모두 포함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정선구·김영훈 기자

sun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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