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문화유산 南北 공동조사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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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한의 개성공단이 본격적으로 조성될 전망이다. 핵문제가 돌출한 가운데 열린 제8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올 12월 개성공단 착공을 합의한데 이어 지난 2일 실무협의회에서는 내년까지 1단계로 1백만평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착공이 늦었다는 감도 있지만 막상 공단 조성이 현실화하는 것을 보면서 드는 우려도 크다.

개성공단 계획이 처음 발표됐을 때 필자를 비롯한 고려시대 전공 학자들은 '하필이면 왜 개성인가'하고 생각했다. 남한과의 거리와 교통, 노동력과 용수 확보 등 입지 면에서 유리한 곳이라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개성은 5백년 동안 고려의 수도였고 공단 예정지인 봉동리(鳳東里)일대는 개성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해 많은 유적과 유물이 산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처럼 남북이 경협 차원에서 하는 사업을 반대만 하기도 어려워 개발은 하되 고려인의 문화유산은 철저히 조사해 보존 대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는 쪽으로 우리의 입장을 정리했다. 이런 주장을 하면 유물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하기 십상이다. 실제로 그런 답변을 정부로부터 듣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유적이나 유물은 증거 제시나 보존이 쉽지만, 문제는 매장 문화재다. 좁은 땅에 오랜 기간 사람들이 살아왔기 때문에 한반도의 웬만한 곳에선 유물이 나온다. 5백년 수도 근처는 더욱 그럴 것이다. 개성 인근의 무덤에서 나온 묘지명(墓地銘)만 해도 3백점 가까이 되고 각지로 흘러다니는 고려 청자의 대부분이 개성 주변의 묘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철저한 조사를 통해 매장 문화재를 찾아야 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땅을 파보기 전에는 매장 문화재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심증은 있지만 당장 물증을 제시할 수는 없다.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선 정밀한 지표조사를 해야 한다. 공사 시작 전에 조사를 해야 하는데, 지금이 그 적기다. 낙엽이 진 뒤부터 풀이 새로 나기 전까지가 가장 적합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공사를 추진하는 현대아산과 정부는 공단 조성 계획에 이같은 문화재 조사 작업을 포함해야 한다.

고고학 측면에서도 개성 일원의 유적은 중요한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고고학은 그 중심을 선사시대에 두었지만 최근엔 중세고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다. 문헌 자료가 풍부한 경우에도 당대 사람들이 남긴 생생한 유물은 그 가치 면에서 후대에 정리된 문헌을 능가하는 법이다. 하물며 문헌 자료가 미약한 중세 연구에서는 고고학 자료가 결정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 고려 시기의 유적과 유물을 풍부하게 보존하고 있을 개성 일대는 중세 고고학의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최고의 보고(寶庫)다.

조사는 누가 해도 좋지만 남북이 공동으로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10월 초 황해북도 송죽리 고구려 벽화고분 발굴에 참여한 나가시마(永島暉臣愼)가 그 결과를 부산에서 공개한 일이 있었다. 일본인 학자도 초청해 발굴하는데 남북의 학자들이 함께 조사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철저히 조사해 보존할 것은 보존하고 그렇지 않은 유물은 공단의 한 곳에 박물관을 세워 전시해야 한다. 개성 일원이 다양하고 화려한 민족문화 유산을 만들어낸 고려의 중심지였음을 후대에 보여주는 것은 공단 조성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선대가 남긴 유산을 파괴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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