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장관·총장 퇴임식>"인권 검찰로 거듭나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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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정길(金正吉) 법무부 장관과 이명재(李明載) 검찰총장의 사표 제출로 수뇌부 공백 상태가 벌어진 5일 과천 법무부 청사와 서초동 대검 청사는 하루 종일 침통한 분위기였다.

검찰 간부들은 하나 같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검찰 조직이 이렇게까지 되다니 정말 허탈하다"는 반응이었다.

◇장관·총장 퇴임식=전날 사표를 내고 출근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던 李총장은 이날 오전 10시쯤 출근해 퇴임 준비를 했다.

청와대로 박지원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을 뵙지 못하고 떠난다. 대통령께 죄송하다고 전해달라"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전했다.

측근에 따르면 李총장은 재임 기간에 대통령의 두 아들을 구속한 것에 인간적으로 미안한 감정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들었던 李총장은 이날만은 청사 근처 외부 식당에서 대검 과장과 연구관 40여명과 점심을 함께 했다. 李총장은 이 자리에서 "어려운 때 후배들을 두고 이렇게 물러나게 돼 죄송하다. 앞으로도 계속해 용기를 잃지 말고 근무해달라"고 당부했다.

李총장은 이날 오후 金장관의 퇴임식이 열리기 직전 과천의 장관실을 방문해 약 20여분간 환담한 뒤 대검청사로 떠났다.

李총장은 이 자리에서 "장관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고 검찰 지휘를 잘못해 죄송하다"고 말했고, 金장관은 "모두 내 부덕의 소치"라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金장관 퇴임식에는 김각영 차관을 비롯한 법무부 간부들과 산하기관 간부 등 2백여명이 참석해 약 20여분 진행됐으며, 시종일관 침울한 분위기였다.

특히 구타 사망 사건이 일어난 서울지검의 김진환 검사장은 고개를 숙인 채 입장하기도 했다.

金장관은 퇴임사에서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둑이 파놓은 우물물을 마시지 말라는 말이 있다"면서 "검찰이 스스로를 갈고 닦아 바로 서주길 바란다"고 주문했다.

李총장은 퇴임사에서 "범죄는 추상같이 다루되 범죄자에 대해선 비록 중죄인이라하더라도 인격체로 존중하고 인간적인 연민을 가져달라"면서 "태산같이 의연하되 누운 풀잎처럼 겸손한 자세로 본연의 업무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했다.

李총장은 퇴임식 직전 기자실을 찾아 "물러나면 산에 가는 것과 목욕하는 것밖에는 없는데 당분간 뭘할지 고민"이라며 "사표를 내는 사람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밝히기도 했다.

대검의 한 간부는 "대통령 아들 수사와 병풍(兵風)수사 등 어려운 시기에 그나마 李총장이 중심을 잡아줘 검찰이 정치권의 입김 속에서도 지탱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돼 있다며 집무실에 짐을 들여 놓지 않았던 李총장은 퇴임식 후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빈손'으로 검찰 청사를 떠났다.

◇선장 잃은 법무·검찰=법무부는 金장관이 늦게 출근한데다 김각영 차관이 국무회의에 대리 참석하고 대부분 국·실장급마저 국회 출석 등을 이유로 자리를 비워 오전 내내 썰렁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金장관의 사표 수리와 피의자 구타 사망사건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의 엄한 질책이 있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직원들은 모두 죄인이 된 듯한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는 분위기였다.

법무부의 한 간부는 "검찰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다"며 "金대통령이나 金장관이나 인권에 대해 매우 심혈을 기울였는데 구타 사망사건이 생겨 더욱 죄송할 뿐"이라고 말했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가혹행위 등 잘못된 수사 관행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위기관리 능력 등 검찰 내부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면서 "근본적인 고문 근절 대책 마련과 함께 위기 관리 능력 등에 대한 정비도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김원배·전진배·장정훈 기자

oneby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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