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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독가스 과학자’ 프리츠 하버(3)

중앙일보

입력

위험한 과학, 위험한 과학자(7)

프리츠 하버의 첫 번째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 화학전공자로 독일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여성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결국 독가스와 화학무기에 광분한 남편에 대한 좌절로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프리츠 하버는1901년 같은 마을에 살던 처녀 클라라 임머바르와 결혼했다. 그녀도 하버처럼 화학자였다. 그러나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여성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 대단히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부인 화학자 클라라 결국 권총으로 자살

그녀도 남편처럼 과학적 경력을 쌓기 위해 유대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하버와 같이 그녀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집고 넘어갈 것은 어떤 면에서 볼 때 당시의 개종이란 지식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부모의 세대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문화적 변화, 또는 색다른 취미의 선택 정도였다. 또 싫으면 본래로 돌아오면 됐다.

지적인 삶과 행복 물거품처럼 사라져

어쨌든 아내는 총명하고 전도유망한 화학자 남편 하버와 지적인 삶과 행복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은 결혼 초기부터 사라졌다.

남편은 지독한 일 중독자였다. 더구나 학문적인 일이라기보다 전쟁을 위한 화학연구였다. 그녀는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의 인생을 공유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결혼한지 1녀 뒤 아들 헤르만이 태어났다. 클라라는 새로 태어난 아기로 인해 남편이 가정적으로 변하고 관계가 친밀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하버의 일에 대한 광적인 중독, 전쟁을 통한 출세욕은 전혀 가라 앉지 않았다.

“저는 점점 파멸해 가고 있습니다”

1909년 남편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가득 찬 클라라는 리하르트 아벡이라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 자신이 처한 불우한 처지를 고백했다.

“나는 항상 주어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며 사는 인생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해 왔고, 삶에서 가능하면 모든 종류의 경험을 하자는 철학으로 살아 왔습니다. 저가 당시 결혼을 결심한 것도 그런 이유가 가장 컸기 때문이죠. 그러나 결혼을 통해 저의 의도를 달성한 건 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정과 결혼생활에서 프리츠가 자신의 억압적인 방식을 지나치게 내세우고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과감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저는 점점 파멸해 가는 것 같습니다” -<히틀러의 과학자들>에서-

권위적인 프리츠 하버 앞에서 클라라는 행주치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부엌데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녀가 쪼그라들수록 남편 하버의 원기는 점점 넘쳐 흘렀다. 그녀가 훗날 이러한 처지를 견디다 못해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 이유도 결국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다.

독일 과학과 과학자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오늘날 독일 과학의 요람이자 세계적인 과학기술 연구기관인 막스플랑크협의 전신인 카이저빌헬름연구소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에 그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만 해도 독일 과학은 세계를 휩쓸었다.

독일은 과학의 메카, 그 중심에 막스플랑크협회의 전신 카이저빌헬름연구소

하버는 독가스를 처음으로 사용한 1차 대전 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또한 그에게 투자하겠다는 사람들도 나타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죄에 대한 제재나 구속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리학, 수학, 생물학, 의학, 화학을 비롯해 기초과학은 물론 응용과학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핵폭탄의 근거가 된 소위 ‘유태인 물리학’으로 통한 원자 물리학의 중심이었으며 오늘날 새로운 과학기술의 풍요를 안겨다 준 양자역학 역시 독일이 본산지이다.

당시 과학의 메카 독일의 중심에는 카이저빌헬름학회가 있었다. 1908년 달렘에 여섯 동의연구소건물로 시작된 이 연구소는 1,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독일의 현대적인 첨단무기개발지로, 그리고 인종학, 우생학을 비롯해 생체실험연구소로 전락하고 만다.

어쨌든 20세기 초 10년 동안 과학기술에 대한 독일 정부의 열정 덕분에 과학자들은 상업적인 의도나 교육적 의무에 상관 없이 자유로운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독일 과학의 황금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벨 과학상 70% 이상을 휩쓸었으며 간혹 다른 나라 과학자들이 타는 경우, 대부분 독일에서 수학한 경우가 많았다.

독일은 과학기술을 산업에 직접 응용함으로써 번영을 구가했다. 특히 화학에서 그들의 응용능력은 대단했다. 또한 독일 과학의 우수성을 지탱해 준 기초과학연구도 소홀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화학산업에 있어서 독일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 화학산업을 이끈 주인공이 바로 프리츠 하버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언제든지 잔혹한 전쟁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 하버 또한 여기에 정열적으로 참여했다.

1차 대전 후 노벨 화학상 수상, 투자가들 줄을 서

그는 조국 독일의 패망으로 독가스를 전쟁에 처음으로 사용한 세계 제1차 대전이 막을 내린 1918년 그 해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암모니아 합성에 의해 질소비료를 무한정 만들어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과학적 업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살인적인 독가스 과학자에게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에 헌신한 과학자에게 수여하는 노벨상이 돌아갔다는 비난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전쟁무기개발에 앞장섰던 과학자에게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제재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독가스를 개발한 재능 때문에 오히려 더 유명 인사가 됐다. 또한 그의 독가스는 세계 각국으로 수출 돼 소수민족의 저항을 진압하는 데 이용됐다.

과학자는 항상 ‘면피’ 속에 사나

그의 재능을 인정한 미국을 비롯해 많은 투자가들은 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며 하버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화학전의 아버지’, ‘독가스의 아버지’라는 숱한 악명에도 불구하고 하버를 사겠다는 사람들은 무지기수로 나타났다.

전쟁과 평화, 이는 사랑하는 남녀에게만 해당되는 가혹한 운명이 아니다. 과학자에게도 꼭 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렇다고 프리츠 하버가 과연 전쟁 속에서 태어나 독가스를 개발해야만 하는 가혹한 업보를 갖고 태어난 학자라고 할 수 있을까? 과학자는 과학의 이름으로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들은 항상 ‘면피’ 속에서 살아왔다. (계속)

김형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