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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 비키니 차림 모델들 카메라에 잡히려 안간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8호 04면

일본에 와서 처음 산 물건은 TV였다. 인터넷을 통해 봐야만 했던 드라마와 버라이어티를 맘껏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좁은 방의 절반을 차지한 TV의 커다란 덩치에도 흐뭇함이 앞섰다. 하지만 웬걸. 나름 바쁜 생활에 쫓기다 보니 그나마 본방을 사수할 수 있는 시간은 늦은 밤뿐.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TV를 켜면 어김없이 나를 맞아주는 그녀들이 있었으니, 바로 비키니를 입은 ‘그라비아 아이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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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비아(グラビア)란 일본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영역의 산업이다. 주로 여성들의 비키니 차림이나 세미누드를 찍은 영상물이나 화보집을 뜻한다. 포르노 등과는 달리 노출을 일정 수위까지만 제한하는데, 전신 수영복 또는 비키니 수영복까지다. 일본의 많은 여배우나 가수들이 그라비아 아이돌을 거쳐 성장했다. 그래서 버라이어티 방송의 단골메뉴인 ‘스타의 과거’ 코너에는 한국처럼 ‘성형 전 사진’이 아니라 주로 그라비아 모델 시절의 모습이 등장하곤 한다.

심야 버라이어티 방송에는 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그라비아 모델들이 떼를 지어 출연한다. 그녀들의 역할은 가슴골이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탱크톱이나 수영복을 입고, 사회자와 게스트의 뒷자리에 앉아 예쁘게 웃어주는 것. 방송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는 비키니 차림도 뜬금없지만, 한 번이라도 더 카메라에 잡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다.

얼마 전에는 새벽 1시가 넘어 니혼TV에서 ‘아이돌의 허점(アイドルの穴)’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프로를 방송한다기에, 아이돌 가수라도 나오나 싶어 졸음을 참으며 기다렸다. 하지만 방송 내용은 10대 그라비아 아이돌들이 (역시나 비키니 차림으로) 출연해 사회자에게 가방을 검사받는다는 컨셉트. 가방에서 ‘아이돌’이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지저분한 손수건이라든지, 싸구려 화장품 등-이 나오면 벌칙을 받는다. 가방에서 성형외과 명함이 나온 한 소녀가 벌칙으로 미끄러운 크림이 잔뜩 발라져 있는 비닐 위에 올라가 사정없이 구르고 넘어진다. 카메라가 비키니 차림 소녀의 몸을 샅샅이 훑는 것은 당연.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프로는 바로 TV 아사히에서 월~목요일 밤 1시15분에 방송되는 ‘전력자카(全力丘)’다. 5분짜리 짧은 이 프로에는 매회 젊은 여성들이 한 명씩 나와 일본 곳곳에 있는 언덕을 뛰어올라간다. 그게 전부다. 그녀들이 뭐 하는 이들인지, 왜 저 언덕을 힘겹게 뛰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일체 없다. 단지 출연자가 대부분 미모의 젊은 여성들이며, 운동복이 아닌 짧은 교복 치마나 몸에 달라붙는 티셔츠를 입고 달린다는 점, 마지막에는 꼭 헉헉대며 숨을 고르는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다는 점에서 이 프로의 제작 의도를 짐작해 볼 뿐이다.

사실 일본 방송의 선정성은 지난 10여 년간 많이 완화됐다. 예전에는 방송에서 여성의 가슴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물론, 환락가에서 벌어지는 야한 쇼를 중계하는 프로그램도 인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2001년 방송 내용을 규제하는 ‘청소년유해사회환경대책법’이 입법되면서 수위가 지나치게 높은 프로그램들이 대거 퇴출됐다. 물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당시 방송계와 많은 남성들의 반발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해도 ‘저래도 되는 거야?’싶은 민망한 장면들이 아직도 버젓이 지상파를 타고 흘러나온다. 아이돌 그룹의 10대 소녀가 버라이어티에서 섹시한 댄스를 선보여 논란이 되는, 아직 순수한(?) 한국의 방송에 길들여진 필자에게는, 새삼 다른 양국 문화의 차이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현재 도쿄 게이오 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하고 있다. 아이돌과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학업으로 승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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