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가 뽑은 '분노의 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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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조지 테닛 미국 중앙정보국(CIA)국장은 지난주 미 의회 청문회에 나와 "현재 미국을 둘러싼 안보 상황은 9·11 테러 직전의 여름에 비견될 정도로 심각하다"고 증언했다. 북한이 핵 개발을 시인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술이 확 깨는(sobering)' 뉴스"라는 반응을 보였다지만 테닛 국장의 증언이야말로 미 국민들 입장에서는 간밤에 마신 술이 확 깨는 충격적 발언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9·11 테러를 우리나라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고, 전세계에 걸쳐 3천여명의 테러 용의자를 체포하고,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가며 테러를 뿌리 뽑겠다고 법석을 떨더니 그 결과가 고작 이거란 말인가." 미 국민이라면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까.

인도네시아 발리 폭탄 테러에서 보았듯 이제 지구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 미 수도 워싱턴과 인근 지역 주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얼굴 없는 저격범이 쏜 총탄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해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런 가운데 프랑스 유조선 폭발, 발리 테러, 필리핀 폭탄 테러 등이 잇따르면서 알 카에다가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에 나선 게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상식은 부시 대통령에게 테러와의 전쟁의 고삐를 더욱 바짝 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엉뚱하게 이라크로 전선을 확대하는 데 더 골몰하고 있다. 알 카에다와 이라크의 연결고리가 입증된 것도 아니고, 지난 걸프전 때처럼 이라크가 이웃 나라를 침략한 것도 아니다. 더구나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에 대한 유엔의 사찰을 전면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부시 대통령은 유엔의 지지가 없으면 혼자서라도 바그다드로 진격하겠다며 이라크를 향해 뽑은 분노의 칼을 더욱 세게 움켜쥐고 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켜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우면 테러가 줄어들고, 따라서 인류가 더 안전해진다는 확신만 있으면 이라크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아랍권의 반미주의를 부채질해 더 많은 테러와 제2의 9·11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단 말인가.

북한이 핵 개발을 시인한 직후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으로부터 북한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부시 대통령은 군사적 대응을 거부하고 평화적 해결을 택했다고 한다. 이중잣대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라크 공격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니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북한에 없는 석유라는 이권과 이스라엘과의 이해관계가 이라크에는 있기 때문이라고 타리크 아지즈 이라크 부총리는 주장한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패권에 무모하게 도전하는 몇 안되는 나라들에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다. '악의 축' 국가들을 한꺼번에 손보기는 어려우므로 일단 시작을 이라크로 할 뿐이지 다음은 북한 차례라는 얘기도 들린다. 세상을 선과 악의 이분법적 기준으로 바라보는 부시 대통령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현대판 종교전쟁이라는 시각까지 있다.

진정으로 미 국민과 인류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어느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 인류는 불안한 눈으로 부시 대통령을 지켜보고 있다. 한 번 뽑은 칼을 도로 집어 넣으면 미국의 위신과 신뢰가 치명적 손상을 입게 된다는 고민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때로는 분노의 칼을 거둘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용기일 수 있다.

bmbm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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