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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과 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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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에 수천 마리의 반달곰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멸종된 지리산 토종 반달가슴곰의 혈통 복원에만 쏠려 있지만 정작 전국의 곰 농장에는 많은 수입 반달곰들이 비좁은 철창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반달곰은 1980년대 농가 소득 증대를 위해 러시아.동남아 등에서 500여 마리를 들여오면서 늘기 시작했다.

몇 년만 키워서 수출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앞다투어 수입했다. 그러나 1993년 우리나라가 멸종위기 야생동물의 국외 반출을 금지한 '국제거래 협약(CITES)'에 가입하면서 수출 길이 아예 막혔다. 팔 수도 없고, 함부로 죽일 수도 없는 데다, 정부도 엉거주춤하는 몇 년 사이 곰들은 새끼에 새끼를 치면서 엄청난 수로 불어났고 이제는 처치 곤란한 골칫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다.

반달곰 이야기는 시장 진입을 일단 허용한 뒤 자유로운 거래를 막을 경우 그 부담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준다. 대책 없는 수입은 아무리 높은 시장장벽을 쌓아놓는다 하여도 결국 고스란히 재고(在庫)로 이어져 시장 교란요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쌀 시장만 해도 그렇다. 최근 마무리된 쌀 협상을 놓고 쌀 재고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완전개방을 10년 미루는 대신 외국 쌀 의무수입물량을 현재의 2배 수준으로 늘려 그 중 일부(10~30%)를 시장에서 유통시키되 나머지는 시장에서 격리해 철저하게 관리하겠다는 것이 협상의 요지다. 그러나 그동안 의무 수입 쌀은 막걸리나 떡에만 판매가 제한적으로 활용될 뿐 시장 거래가 막혀 상당수가 창고에 재고로 쌓였다.

농림부 관계자는 "의무수입물량이 늘어나는 만큼 수입쌀 재고가 늘어나게 돼 올 연말께엔 1000만석이 넘을 전체 쌀 재고량 중 수입쌀이 절반 가까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며 걱정이 태산이다. 때문에 수입 쌀이 반달곰처럼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기 전에 본격적인 대책을 세워야한다는 게 농업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혹자는 남아도는 외국 쌀이 문제라면 식량이 모자라는 북한에 주면 될 것 아니냐고도 말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수입한 외국 쌀이 한국 시장에는 얼굴 한번 못 내밀고 북한으로 통째로 넘어가는 상황을 쌀수출국들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남북교역의 국제법적 해석도 문제다. 정부는 남북교역은 무관세로 주고받을 수 있는 민족 내부거래로 규정하고 있지만 세계무역기구(WTO)에선 관세를 물어야 하는 국가 간 교역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유력하기 때문이다. 쌀밥 한 그릇 더 먹자는 캠페인을 벌인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의 입맛은 바뀌기 시작해 장병용 배식 쌀을 대폭 줄이고 반찬을 늘린 국방부의 '웰빙 식단'까지 등장하는 판이다.

박홍수 농림부 장관도 "수입 쌀이 시장에 나와도 소비자의 45%가 값과 품질만 괜찮으면 사먹겠다고 한다"면서 "젊은 자녀가 노모를 돌보듯 농촌을 돌봐달라"고 호소할 뿐이다. 전문가들은 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앞으로 10년을 농업 구조조정에 전력을 기울일 마지막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대 정영일 교수는 "외국 쌀을 시장에 다 풀어놓아도 괜찮을 정도로 이른 시일 내에 우리 쌀 시장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면서 "쌀 이외의 혼작체제를 갖추고 고품질 쌀도 개발하는 등 쌀 과잉 생산 요인부터 차근차근 줄여 나가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완전개방을 10년간 미뤘다고 안심할 게 아니다. 조속히 소비자의 요구가 가격으로 반영돼 수급 조절이 이뤄지는 자유로운 시장경쟁이 생겨나고 이를 견딜 수 있는 우리 농업을 만들어야 한다.

홍병기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