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核 변수에 곤혹스런 여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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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북한이 우리 정치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관여하는가를 경각심을 갖고 봐야 한다. 그들은 과거에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현재도 영향력 행사를 위해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DJ 정권 출범과 함께 구속되는 등 움츠려 있던 권영해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이지만 북한의 대남 공작 대목에선 목소리를 높였다. "대선 후보가 되면 북한에 못 가 안달하고 추파를 던지는 인식부터 고쳐야 한다. 김정일이 이런 상태를 얼마나 즐길까를 생각해 보라." 그는 한둘 이상의 실명 거명은 자제하면서 "북한은 훗날을 대비해 정치 신인까지 키우고 있다"는 걱정도 했다.

하기야 대북 전략을 총괄했던 인사의 확인이라서 놀랄 뿐이지 대개는 짐작했던 대로다. 우리는 북한이 한국 정치, 특히 선거에 매번 개입한 사례들을 기억한다. 13대 대선 전 KAL기 폭파, 4·11 총선 전 판문점 도발 등등. 1997년 15대 대선 때는 유력 3당 후보 진영이 모두 북한 공작팀과 접선하느라 베이징(北京)으로 몰려갔다. 적을 집 안에 끌어들인 셈이었고, 한국 정치를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는 여건을 보다 확실하게 조성해 줬다. 이때의 '거래'가 저들에게 약점을 잡히는 계기가 됐을 수도 있다.

선거 때마다 어김없이'개입'

그렇다면 올해 대선은?

국민의 안보 불안감은 대체로 여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DJ 정권에선 이 도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당장의 북한 핵 개발 사태만 하더라도 여권 후보에게는 부담스러운 요소다. DJ 햇볕정책의 허구성을 드러낸 때문만은 아니다. 몇몇 대북 전문가나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등도 제기해 온 현 정권 일각의 '미심쩍은' 대북 행적이 근본 요인일 수 있다. 평양을 십여차례 넘나든 공작원 출신 P씨(48)는 기자에게 이런 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반(反)이회창 '통합 후보'로 유력시되는 정몽준 의원에게 현 사태는 달갑지 않을 게 분명하다. 본인은 억울할지 모르나 鄭의원의 근거지인 현대가 4천억원 대북 비밀 지원·특혜 대출 의혹에 휘말려 있는 터에 북핵 문제가 더해지자 鄭의원이 과연 대북 정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되는 탓이다.

鄭캠프에 달갑지 않은 사태

2년여 전 일본의 한반도 문제 전문지 '겐다이(現代)코리아'는 김정일이 99년 4월 조총련 제1부의장 김만술에게 한 발언을 보도한 바 있다. 거기엔 "정주영은 자기 아들을 차기 대통령에 세울 야심으로 우리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운운하는 대목이 있다(월간조선 2001년 3월호). 보도대로라면 金이 이후 무슨 일을 어떻게 꾸미는지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다. 최근 우리 측 인사를 만난 북한 고위 관계자는 대선, 특히 박근혜 미래연합 대표가 金을 만난 뒤 쇠락한 사실을 의아해하며 鄭의원의 부상 배경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정말 헷갈린다.

북한의 음모·공작이 그대로 먹혀드는 게 아니고, 누구를 지지 또는 저지한다고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거 전 짧은 시일 안에 판단하고 대응하는 게 쉽지 않고 따라서 놀아나기 십상이다. 權전부장은 "북한이 어떤 일을 벌이더라도 조사가 불가능하다. 말 한마디로 우리를 교란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치의 주요 변수로서 북한이 더욱 위협적인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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