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편의 가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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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3면

"안녕을 말하는 것은 잠시 죽는 것이다."

어느 소설가가 이별에 대해 남긴 문구다. 가을이 배경인 영화, 가을에 관한 영화 중에선 만남과 이별에 관한 것이 꽤 많다. 싸늘해진 바람, 한 해의 절반이 훌쩍 지나버린 우울함 탓은 아닐는지. 제목에 '가을'이 포함되는 영화 중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만남과 헤어짐의 장면을 떠올려보자. 하지만 눈물 흘리지는 말 것.

'가을의 전설'(감독 에드워드 즈윅)은 설명이 필요없는 영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배경인 이 영화는 어느 삼형제와 한 여성의 뒤엉킨 사랑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브래드 피트가 등장하는 장면들이다.

그는 황금빛으로 물든 황야를 말을 타고 달려온다. 카메라는 멀리서 브래드 피트가 다가오는 모습을 포착하고 고향 사람들은 개선장군을 맞듯 환영한다. 영화는 익숙한 삼각관계의 변형에 그치지만 할리우드 영화가 스타시스템을 부각하고 강화하는 것을 지켜보기란 흥미롭다.

'뉴욕의 가을'(조안 첸)은 풍경이 예쁘다. 리처드 기어가 레스토랑 경영자이자 바람둥이로 나온다. 진정한 사랑이 그에게 다가오는데…, 아뿔싸! 나이 어린 그녀는 시한부 인생이다. 구태의연한 신파이자 멜로드라마다. 이건 10여년 전에 봤던 어느 영화랑 비슷하잖아. 탄식이 나올 법하다. 그럼에도 볼 만하다. 회색 머릿결의 리처드 기어와 귀여운 위노나 라이더가 낙엽지는 공원을 산책하는 장면이 근사하니까. 우리들이 간직한 연애 팬터지를 자극한다.

'가을 소나타'(잉그마르 베리만)는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이고 딸은 외롭게 성장했다. 몇년 만에 재회한 모녀는 서로가 증오로 가득 차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는 집요한 심리드라마다. 실내에 붙박힌 채 두 사람은 과거의 일들을 끄집어내 상대를 괴롭힌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연기가 훌륭하다.

"이런 남자는 어때?" 에릭 로메르 감독의 '가을 이야기'는 프랑스 영화다. 마갈리라는 여성은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이 중년 여성이 주변 사람의 소개로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인연을 맺게 된다. 영화는 잔잔한 톤으로 진행된다.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듯 영화 속 인물은 사랑이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지닌다. 누벨바그 감독이자 걸작 '녹색광선'을 만든 로메르 감독의 사계절 연작 시리즈 중 한편이다. 결이 고운 영화다.

한때 붐을 일으켰던 홍콩영화 세대라면 '가을날의 동화'(장완정)를 기억하고 있을까? 저우룬파(周潤發)와 중추훙(鐘楚紅)이 주연했다.

뉴욕을 무대로 엇갈림을 되풀이하는 남녀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영화음악, 아기자기한 소품들, 그리고 절제된 분위기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영화 주제가는 '가을날의 동화'의 쓸쓸한 사연을 요약한다. "내 마음의 사랑을 다시 찾고 싶지만…아쉽게도 그 가을은 멀어져 갔군요."

김의찬·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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